망설임 없는 맑음으로

by 지음

머뭇대듯 머문 햇살. 하루, 장마 사이의 해 뜬 날이 천천히 흐른다.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산책 나온 아가의 웃음이 맑게 울린다. 그늘이 만드는 경계를 따라 걷는 발걸음이 신나 있다. 햇살은 역시 조금 못보다 만나는 햇살, 시원한 비 내린 뒤에 만나는 젖은 햇살이 가장 달콤하다. H 카페에 도착했지만 조금 더 걷기로 한다. 좋다. 비가 다 마르지 않은 연희맛로를 성산로 에서부터 연희동이 끝나는 곳까지 걷고 돌아왔다. 그사이 긴 시간을 들이며 구름은 다가와, 바람도 쫓아온다. 그림자가 흔들려 위를 본다. 6월을 맞은 플라타너스, 새로 뻗은 가지들이 흔들린다.


요즈음엔 하루걸러 하루 이 카페를 찾는다. 통창으로 벽 한 면이 전부 열려 있는데, 바로 앞이 좁은 도로다. 오밀조밀 관찰할 게 많아 좋다. 플라타너스도 눈앞에 붙어 서 있고. 늘 아래쪽에서만 관찰해 온 나는, 이맘때면 무성함을 자랑하는 플라타너스의 모든 이파리가 다 자랐을 거라 착각해 왔나 보다. 2층 창가에서 바라보니 다르다. 큰 줄기를 빗겨 나온 새 가지들은 아직 자라나는 중이었다. 5월에 키가 자란 부분에 새싹 같은 이파리가 돋아 있다. 없던 곳에서 자라나고 있으니, 늦게 자라는 게 흠일 리 없다. 다 자란 아래쪽 이파리와 새로 피어나는 이파리를 동시에 단 나뭇가지가 바람을 타고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흔들린다.


긴 서울 생활, 20년 동안 무관심했던 나무가 이제야 좋아졌다. 전봇대와 서 있어도 그림 같고, 드문 하고 커다란 이파리는 흔들림 그 복잡함의 차원을 낮춰 주어 바람 안의 것들을 명확히 인지하게 한다. 가을에 큰 낙엽이 걸리적거리는 나무로만 여겼었는데, 돌아보니 재미있다. 둘은 같은 현상의 다른 순간일 뿐인데, 이젠 발로 차며 걷던 나뭇잎을 조심히 피해 걷는다.


새파란 야채 먹기보다 느리게 다가오는 이끌림이 남아 있다는 것이 기분 좋다. 아직, 또 무언가를 기대하게 해준다. 글을 쓰다가 멍해지는 순간이 오면, 무심코 바라본다. 흔들리는 모습, 이파리가 자라난 크기 같은 것들을 헤아리다 보면 시간도 지친 나도 부드럽게 흐른다. 좋아하는 카페의 넓은 창가를 지키고 선 녀석을 반복해서 바라본 시간이 쌓인 탓이리라.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여러모로 좋다. 바라봄 만으로 좋아하는, 나의 좋은 모습을 되찾게 해준다. 오래 보아야 이쁘다. 2층에서 보아야 아름답다. 플라타너스는 내게 그랬다.


그날, 내가 잡고 있었던 글은 꽤 오래 묵힌 난적이었다. 꽃 핀 계절로부터 두 달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나아가질 못했다. 길 건너, 꽃잎도 다 떨어져 이파리만 무성한 이팝나무를 흘겨보아도 단어가 나타나지 않아 눈을 깔듯이 플라타너스로 옮겨온 참이었다. 굵은 가지로부터 크게 둘로 나뉘어 올라가는 나무의 갈림길을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말할 필요 없이 위아래로, 잔가지에서 옆의 잔가지로 충분히 눈을 옮겨 다녔다. 이 층에선 잘 보이지 않는 꼭대기를 보려 창 가까이 책상을 넘은 자세로 기대어 올려다본다. 스스로 한 엉뚱한 행동에 웃음이 나서 바보처럼 웃다가 알았다.


가지의 흔들림이 다르다.


좀 더, 오래 보면 좋았겠지만 팔이 떨려와 툭. 자리를 고쳐 앉는다. 괜찮아, 눈앞에도 새 이파리가 달린 가지가 있으니까. Y자를 이루는 굵은 나뭇가지 사이 오목한 곳에 대조군이 빽빽이 뻗어 있다. 높이가 주요 변수가 아니라면 비슷한 '것'을 통한 분석은 과학적 허용 범위 안. 어느덧 멍하던 눈을 빛내며 역학과 통계, 데이터 분석을 다루는 본업의 마음가짐으로 가지들을 살피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바람을 많이 받는, 무게도 많이 나가는 나뭇잎의 바람 탐에 가장 크게 영향받았지만, 작은 이파리의 흔들림도 미세한 방향 전환에 가세하는 것이, 보였다. 얼마 전 학교 아이들과 스티로폼 행글라이더를 날릴 때 꼭 그랬다. 작은 뒷날개의 쳐짐이 나아가는 궤적을 달라지게 하곤 했다. 지금의 흔들림도 꼭 그런 모습을 닮아 있었다. 보통의 큰 이파리가 갈법한 방향에서, 전향되는 순간들이 잦았다. 모두의 합력이 반영된 움직임이 유려하다. 오래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런 조화가 가능함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큰 힘 하나로 단순하게 규정되는 사회에 흔한 형태가, 나에겐 더 익숙했다. 자연스럽다는 착각을 확신했었다.


존재는 당위를 뒤집곤 한다. 자주 관찰되는 존재는 당연함을 자연스러움으로 위장 하곤 한다. 가장 확률적인 추정이 뒤를 받친다.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는 플라타너스의 가장 여린 나뭇가지에, 가장 자신 있는 통계적 추리 능력을 긁혔다.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의 바람을 타는 모습은, 사실 플라타너스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역학적 현상이다. 하지만 플라타너스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가지를 움직이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난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움직임을 보일 것만 같았다. 자연은 늘 그러니까. 하나하나의 나뭇잎을 배제하지 않고 하나의 온전한 나무로써 모든 것들이 조화로운 춤을 출 것이다. 꼭 지금만큼 유려한, 선형으로 회귀 되지 못하는 움직임으로.


지금의 이파리들도 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피어나는 이파리들을 포기하지 않고, 존중하고, 함께 춤출 수 있어야 한다. 순환의 계절이 흐르고 나면 새싹은 나뭇잎이 되고, 미래의 광합성을 하고, 뿌리를 버티게 하는 푸르름이 될 것이다. 플라타너스가 자연스레 그리하듯. 첫 바람을 받는 이 정부가, 효능감 주는 것을 넘어 피어나는 새싹들에게도 다정한 정책을 내주기를 괜히 기대해 본다. 망설임 없는 맑음으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망설임 없는 맑음으로.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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