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놀이 2

by 지음

가을을 알리는 급작스런 호우가 내린 뒤, 아침. 먼 동이 터 희무끄래한 길을 걸으며 난 충동에 빠져들고 있었다. 굴곡진 시멘트 바닥의 오목한 부분마다 차있는 맑은 웅덩이. 여름의 마지막 청량함이 담긴 곳에 뛰어들고 싶다!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장화를 신고. 사방으로 물 튕기며 걸으면 상쾌할 텐데. 딱히 화난 것도, 울적한 것도 없이 튀어나온 이런 욕망이라니. 인간의 심장 속 어딘가엔 늙지 않는 아이가 영원히 사는 걸까? 어제 홍대서 본, 반대쪽 어깨 찌르기 장난을 치던 영감님들처럼. 젖은 곳을 피하면서도 신나서 걷는다.


이른 새벽인데 인부들은 벌써 옹송거리고들 있었다. 학교에서 연희동으로 건너가는 큰 길가엔 꽤 괜찮은 곳에 오래 방치된 건물이 있다. 그 옆엔 작은 공터가 있는데, 의외로 이곳에 건물이 먼저 올라섰다. 일부러 녹슨 철을 쓴 건지, 지어지기도 전에 고풍스런 느낌이 나는 건물. 유리창을 달 모양이었다. 한쪽에 창문 유리를 가득 싫은 차가 있다. 이내 사다리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인부들이 모두 3층의 창 빈 틀을 보며 한 마디씩 하고 있었으니까. 고됨을 마다 않는 일꾼들이 밟고 선 흙 웅덩이를 피해 슥슥 걸었다. 점잖은 아재라도 된 것처럼.


카페에서, 혹은 학교나 도서관에서. 펜 잡는 일들을 전전하다 보니 토건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의는 어느덧 존경심으로 자라나 있었다. 가깝고 많이 아는 것보다 한 발 떨어져 잘 모르는 경우가 순진한 존경심을 키우긴 좋은가 보다. 가끔 건물이 무너지고 도로가 갈라지는 것들을 들을 때면, 그 모든 일들이 대단하고 훌륭하게 이루어지는 건 아님을 느끼기도 하지만, 상관없다. 다섯 평 남짓 한 연구실의 장비들을 세팅하는 것으로도, 하루를 기진하는 나니까. 건물을 올리고 도로를 쌓는 일이, 내겐 과학보다 더 마법 같다. 밭에서 흙을 퍼 나르려 맨 땅에 삽질을 할 때면 그 존경은 이제 위대함으로 진화한다. 그 야생의 대지를 다스리고 인간의 편의를 견뎌내는 토대로 만드는 일의 고됨. 그 위를 딛고 세워지는 도시의 탄생은 늘 생경하고 아름답다. 아버지가 생전에 토목 일을 하셨던 것이 가장 영향이 큰 것 같지만.



학교에 늦을 일이 없었다. 당시 봉개는 촌동네. 버스가 많지 않은 학교까지 아버지 차를 타고 등교했다. 3년을. 아침 식사는 여섯 시. 정시보다 30분은 일찍 사무실이나 현장에 도착하는 아버지 일정을 맞추느라 일곱 시면 등교를 마쳤다. 외려 당연했다. 내 턱수염이 나기 전부터 아버지는 늘 그랬으니까. 야자가 끝나는 밤 9시까지. 열네 시간의 일과와 주말까지 이어지는 공부가 조금 지겨워질 때면, 슬며시 다용도실에 들어갔다. 일 하느라 밑창이 너덜너덜해진 작업복에 짙게 베인 아스팔트 향기. 곧 나의 고단함은 아무렇지 않아 졌다. 아빠는 퇴근하고도 나를 데리러 오는데. 무너질 수 없는 기분. 현장 일들은 상상보다 고되다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좀 더 성실할 수 있었을까? 카페까지 걷는 동안 아스팔트 냄새가 나를 따라다녔다.


카페에 가고, 걷고, 다시 카페에 들렀다. 밥까지 먹고 나니 해는 정오를 넘어섰다. 정점에 가까운 태양. 오전 동안 쌓여 충만해진 열기. 5분 만에 등과 팔에 땀이 가득했다. 한 시간만 더 카페에 있다 나올걸!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새참은 먹고들 하는 건지 유리창 달기 작업이 아직도 한창이다. 보아하니 한 층만 더 작업하면 될 일이라 강행하는 듯했다. 헬멧을 쓰고 위쪽을 바라다보며 지시를 하는 이의 등이 땀으로 가득 젖어 있다. 아니 땀의 호수 위에 셔츠가 떠 있었다. 밟고 선 빗물 웅덩이는 그 물이 흘러넘쳐 생겨난 것 같다. 그 위로 짙게 드리운 그림자가 물결을 따라 흔들린다.


바닥을 디디고 선 이가 이 정도. 사다리차 위에서 무거운 유리를 들고 조율하는 이는 어떨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알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잠시 멈춰 작업을 바라본다. 멋있다. "어어! 거기 서있으면 안 돼요~!" 다급히 제지하는 목소리를 따라 밀려 섰다. 지나갈 줄 알았지, 멍하니 올려다볼 거란 생각은 안 했나 보다. 빠르게 단도리 해놓고선 이동해 다시 위치를 조율하기 위해 소리 지른다. "좀 더! 좀만 오른쪽으로!" 사람들이 움직일 줄 알았는데, 사다리가 미세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발판 위의 사람들은 단단히 들고 서 균형을 유지한다. 기계의 움직임에 따른 진동을 버티려는 모양이었다. 신호수가 두 역할을 맡아 바빠진 이유일 테다. 내 느림질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설렁설렁 움직인다. 연신 위를 올려다본다. 이렇게 건물은 창을 두르는구나. 축축한 노동을 통해. 단단히 디디고 선 지지의 힘으로. 사다리차를 올라타 길어진 사람들의 잔상을 꾹꾹 밟으며 걸었다. 그 모습들을 마음에 새겨 두며,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길을 밤새 보수하던 아빠의 모습은 어땠을지 상상해 봤다. 천천히. 아쉬움이 느껴질 만큼 충분히 느린 속도로.



학교로 가는 언덕을 오르며. 이마와 뺨을 타고 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억센 일을 하던 사람들과 물 위로 흔들리던 것들을 떠올렸다. 한낮의 땀 뚝뚝 흘리는 이의 그림자. 빈손으로 맞아도 뜨거운 햇살을 하중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삶. 유독 검게 그을린 그림자. 태양을 피하지 않고 섰을 때, 그가 가장 그늘을 드리워 주고 싶었던 이는 누구였을까. 그가 창과 함께 날개를 달아 주고 싶은 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빠가 있을 흰 구름을 올려다보며 괜한 상상을 펼쳐본다. 그러곤 세상 모든 건물들은 저렇게 튼튼한 육체의 힘으로 붙여 놓은 창을 달고 있는 거란 생각에 조금 찡하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 때. 에어컨이 시원한 방 안에서 창 밖의 구름을 바라볼 때. 조금 더 따듯한 마음으로, 지탱받는 감사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낮게 삐걱거리는 창틀에 불만을 쏟지 않고서.


하루 종일. 교실과 교무실을 따라다니던 무언가를 느끼며 든든했던 저녁. 퇴근길. 집으로 쏙 들어가기 아쉬워 주택가를 산책하던 참이었다. 가로등 밑을 걸으며 좀 더 여운을 느낄 요량으로 돌아 돌아 가는데 느린 무리가 막아선다. 세 살쯤 된 아가가 엄마와 걷고 있다. 아장아장 두 세 걸음을 더 걸으며 서로의 그림자를 포개며 장난치는 아가와 엄마.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나보다도 젊은 아빠의 그림자. 그림자가 잠에 못 이겨 기웃기웃 흔들린다. 걷는데, 어찌 저렇게 크게 기울 수 있는 거지! 웃으며 지나 치려는 데 아가가 휙 뒤돌곤! "아빠 그림자! 잡았다!" 라며 자기 그림자를 아빠 위로 덧 씌우는 것을 보았다.


잊지 못할 것같이 사랑스러운. 너무 흐뭇하게 입술이 귀 쪽으로 당겨지는 게 느껴져 툭툭 걷는다. 의심받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다른 것을 보려는 듯 고개 돌린다. 아가가 아빠의 어깨 위에 타고 있다. 잠은 다 깬 건가? 아이를 태웠으니 졸음운전은 안 하겠지? 하곤 돌아선다. 하하하 소리가 귀로 들어와 미소로 빠져나간다. 맑다.


아빠란 그렇구나. 갑자기 툭 눈물이 나서 정말 빠르게 걸었다. 뛰기 시작했다. 낮의 여파였는지, 어땠는지. 백열등이 엘이디가 되는 동안 더욱 밝아진 가로등. 그로 인한 그림자들이 나를 따라 뛴다. 변덕이야. 이건 아직도 물장난 치고 싶은 내 맘 속 아이가 변덕을 부린 거라고 괜히 둘러댄다. 숨이 찰 때까지 뛰려다 어디선가 아스팔트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멈춰 선다. 그리운 냄새에 얼굴을 파묻은 듯, 잠시 내쉬는 숨조차 조심스럽다. 그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때. 내 맘 속 아직도 장난꾸러기인 아이가 저렇게 아빠를 안아 줬었기를. 그래서 아빠도, 저렇게 큰 소리로 웃었기를.


빌었다.




ChatGPT Image 2025년 11월 29일 오전 10_36_12.png


keyword
수, 토 연재
이전 19화홍제천의 붉은 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