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아침마다 나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차 안에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 얼굴 점수 매기기를 하며 놀았다.
차 안에서 영어도 가르쳐 주셨는데, “해야 해야 붉은 해야” 같은 한국의 전래 동요를 “sun sun red sun”으로 번역해서 가르쳐주셨다.
아빠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서 일본어를 아주 잘 했는데 어린 시절 가끔 나에게 일본어로 된 자장가를 불러주셨다. “낸 낸~~” 으로 시작하는 자장가의 멜로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 기간 중에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있으면 방문을 열고 밖에서 춤을 추셨다. 코에다 두 손을 대고 마치 나팔을 부는 것처럼 춤을 추셨다. 한번도 “공부 잘했다”, “서울대를 붙다니 장하다” 같은 칭찬은 안 하셨다. 다만 춤을 추며 공부하는 딸을 응원하신 것 같다.
포항 제철 창립 멤버라 내가 5살이 될 때까지 포항에 사셨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 거주했으므로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지낸 기억이 없다. 아빠가 3개월 정도 회사를 쉬셨는데 나를 산에 데리고 다니면서 싸리 나무로 긴 빗자루를 만들곤 하셨다. 그리고 오골계, 꿩, 토끼, 오리 등을 사서 마당 한 구석에서 키우셨다.
아빠는 곧 새 직장을 다니게 되었고, 집에서 키우던 가축은 하나 하나 저녁 식탁에 올라왔다 ��
아빠는 형제 중 둘째였지만, 형제 중 처음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다른 형제들보다 벌이가 나은 편이었다. 형제들이 결혼을 하거나 조카들이 대학에 갈 때 아빠는 조용히 목돈을 마련해서 주었다. 나의 사촌언니는 아직도 아빠가 도와준 걸 고마워 한다.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다정하게 구는 스타일은 아니셨다. 그러나 성실히 일하고,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면서 그 사랑을 표현하신 것 같다. 나는 가끔 아빠가 날 사랑했던 걸까 의심이 간다. 아빠는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다소 차갑고 낯도 많이 가린다. 그러나 아빠의 성실함은 늘 우리 가정의 든든한 힘이었다.
아빠는 3주 전 소파에서 주저앉아서 고관절에 금이 갔다. 그럼에도 강한 정신력으로 재활 치료를 잘 받고 계시다. 며칠 전에는 일어섰다. 6월말쯤 퇴원하면 집에 돌아가실 수 있을 것이다.
아빠의 얼굴을 만지고 손을 잡을 수 있는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아빠의 폐에 암 종양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최대한 자주 찾아뵈야겠다. 그리고 같이 맛있는 밥을 먹고 농담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