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73살까지 현역으로 일하셨다. 포항제철 창립 멤버였고, 대림산업 산하 중소기업에서 오래 일하셨다. 말년에는 대림대학 학장이 되어 전문대생들이 졸업 후에 회사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교육을 받도록 애쓰셨다. 퇴임 후에는 3-4년 좀 허전해하셨다. 그러다 내가 아이들을 낳은 후에는 두 손녀를 키우는 것으로 노후를 보내셨다.
첫애를 낳고 6개월쯤 됐을 때였다. 나는 친정에 있었는데 마침 보일러가 고장이나서 한겨울에 온 집안이 냉골이 되었다. 아기는 햇볕이 잘 드는 안방에 난로를 켜고 재웠다. 밖에서 어른들은 보일러를 고치느라 하루 종일 애를 썼다. 다행히 보일러를 고치고 집 안이 다시 따뜻해졌다. 그 와중에도 큰 애는 쌔근쌔근 잠을 잘 잤다. 그 모습을 보고 아빠는 너무나 사랑스럽다며,
“천사가 따로 없다. 어찌나 예쁜지”
하며 함박 미소를 지으셨다. 심지어 아기가 너무 예뻐서 버려진 아기라도 데려다 키우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다. 평생 무뚝뚝하고 차가웠던 아빠가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좀 놀라웠다.
둘째를 낳기 얼마 전 부모님은 우리 아파트 단지로 이사를 오셨다. 우리가 중국에 주재원으로 떠나기 전까지 6년 넘게 우리 근처에 살면서 육아를 도와주셨다. 자식들에겐 완전 자린고비 구두쇠 아버지였는데 손녀에겐 호구인 할아버지였다. 두 손녀는 할아버지와 함께 집앞 다이소를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다니며 온갖 장난감과 문구류를 사왔다. 엄마는 손녀들에게 잔소리도 하시고 훈육을 담당했지만, 아빠는 그저 잘 놀아주고 뭐든지 오케이하는 그야말로 스위트한 할아버지였다. 상대적으로 엄마보다 아빠가 손녀들에게 훨씬 인기가 좋았다.
우리는 휴일이면 종종 부모님을 모시고 나들이를 했다. 가까운 서울숲에 단풍을 보러가거나, 올림픽 공원에 장미를 보러 갔다. 또 구리 한강공원에 코스모스를 보러 가거나 미사리 조정경기장 공원에 가서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국내 여행도 같이 자주 다녔다. 시댁 어른들이 사시는 부산에 가서 양가 어른들이 식사도 하고, 엄마가 졸업한 고등학교에도 가봤다. 안동 고택에 놀러 간 적도 있는데 아빠가 특히 좋아해셨던 기억이 난다.경주, 제주도, 단양에도 함께 놀러갔다.
아이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라서인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정이 많은 사람으로 자랐다. 지금은 요양원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만날 때마다 뽀뽀하고 포옹한다. 아이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여전히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신 따뜻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