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받은 방문 예고 편지에서의 그 언젠가는 몇 달 뒤 2005년 10월이었다. 먼 훗날(Someday)의 어감으로서는 너무 일찍, 내가 '언젠가' 미국에 가게 되면 연락이나 해볼까라는 상상을 길게 해 볼 필요도 없이 멀더는 다시 한국에 왔다.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 서점 안에서 책을 구경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로젠 씨'라고 불렀다. 그 세음절이 염상섭! 발음을 떠오르게 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뒷모습을 먼저 발견해도 보통은 얼굴 앞으로 서 아는 체를 하는데 왜 남의 등에 대고 이름을 부르는지. 통영 충렬사의 사당에서 내 뒷모습을 찍던 멀더가 떠올라 뒤돌아 보았다. 맙소사!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실제 나이 26살이 된 그는 많이 늙어(?) 있었다.
통장을 개설해야 된다고 해서 은행으로 갔다. 번호표를 뽑고 내가 '통장이 영어로 뭐냐...'라고 그냥 혼잣말을 했는데, "뱅크북bankbook이에요"라고 그가 바로 알려주었다. 나는 통장이 영어로 쉬운 말이라서 놀랐고 멀더의 자연스러운 한국말에 더 놀랐다. 한 단어를 발음할 때는 아저씨 같은 목소리더니 문장을 길게 말할수록 젊은 목소리로 바뀌었다. 얼굴은 아저씨에 가까워지고 한국어목소리는 젊어지고? 이게 무슨 명랑 만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인가. 너는 한국어를 잘하기 위해 누구와 무슨 거래를 했니?
우리 차례가 돼서 창구 앞에 앉으며 직원에게내가 '이 외국인이 통장 개설을 원한다' 하니, 은행 직원이 '저는 영어를 못한다고 나보고 옆에 있어달라'라고 하신다. 저도 그다지... 이렇게 말하려 할 때,제이슨이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할 수 있어요". 창구 직원의 긴 말을(?) 바로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대답도 척척이다. 은행 직원이 감동받은 표정으로 바로 “와!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는데요!” 하니, 멀더는 어깨를 들썩이며 나를 보았다. '이쯤이야'
이게 바로 네가 기다리던 순간이었어. 그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순간이었다. 불광불급! 미친 듯이 해서 미쳤구나! 나도 박수를 쳐주는 시늉을 했다. 멀더는 모든 한국말이 들리는 듯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분위기였다. 그러나 곧 언제나 그랬듯이, 혼자 통장을 만들면서 에너지가 소모되어 배고프다고 (항상 배고픔의 이유도 명확히 설명한다) 해서 종로 거리로 나갔다.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의 소소한 추억을 얘기하자고 했던 바로 그 종로 거리에 왔는데, 얼마 걷지도 않고 아는 골목인지 바로 들어간다. 어딜 찾아보는 시늉도 없다. 거리낌 없이 들어간다. 아... 2년 만에 재회를 원통 식탁이 있는 삼겹살집이라니. 너는 뉴요커라며? 아주 조금만 세련되면 안 되겠니? (이때는 이런 오해가 있었다 뉴욕에 산다고 다 고층빌딩에서 우아하게 근무하는 것이 아닌데)
이제는 한국말이 잘 들리니 '내 취향은 아니'라고 큰소리로 '중얼거려 볼까' 했으나, 멀더가 여기 괜찮아요?라고 물어봐서 그냥 따라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구사하다니! 하면서 말이다. 나는 멀더가 한국말을 술술 하고 있어서 그저 감탄하느라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영어 단어와 내 콩글리쉬를 섞은 대화였지만 더 이상 사전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방문 예고 편지에도 썼듯이 한국어를 깊게 이해하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외국인이 삼겹살 집에 앉아서 한국어를 깊게 이해하고 싶다니 정말 감동적인 장면인데... 당시 나는 솔직하게 그 말에 감동을 받거나 하지는 못했다. 어학 카페에서 만난 두 번째 학생 루이스와 1년 정도의 장기간에 걸쳐 깊은(?) 수업을 한 여파(?)가 그때까지도 가시질 않고 있었다. 루이스가 간 지 반년이 지나지 않아서 멀더가 다시 와서 깊이있는 수업을 이야기하다니. 그것도 계속 공짜로? 왜 나한테는 이다지도 깊게 이해하고 싶은 분들(?)과 인연이 닿은 것일까라는 심정.
한국어의 게슈탈트를 알고 싶어요란다. 게슈 뭔트?라고? 글자로 적어 주겠단다. 나는 그날 들고나간 한국어 책을 꺼내 뒷면을 펼쳤다. 멀더는 내 책 위에 게슈탈트(gestalt)라고 적었다.유명 인사에게 받는사인도 아니고. 어딘지 익숙한 장면인데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다. 그전에 내가 멀더의 한국어 책에 여러 가지를 적어주었다. 그러고는 내가 무심코 꺼낸 한국어 교재를 카드 정리하듯이 주르륵 대충 훑어본다. '이제는 네가 이 책의 오류를 지적하겠구나' 할 정도의 기세다. 처음 듣는 개념이었지만 제이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어의 전체 모습을 이해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교수님을 찾아가야 하지 않나요? 외국어를 3.4등급에 이르면 그 언어를 둘러싼 배경을 알고 싶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멀더는 한국어에 깊이 빠져있는 듯했다.
광화문 사거리 교보문고 앞 정거장으로 걸어 나왔는데, 제이슨이 광화문쪽을 가리키면서 '이 코너를 돌아가면 로젠이 사랑하는 남자가 서 있단다.' 거기에? 나도 모르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그게 누군데?? 아!... 푸하하하. 나는 영웅으로 인식된 이순신보다는 400년 전에 근대적인 인간으로 살았던 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가 남긴 하루하루의 기록말이다. 이런 이유를 내가 멀더에게 설명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난중일기』가 세계기록유산이 된 데에는 다 그만한 가치가 있음이야!
한국어를 배우는 시간은 오후 3시로 정했다. 종로 거리에서 몰아치는 재회를 마치고 헤어질 때 시간을 다시 확인하려고 택시를 타려는 멀더를 불렀다. 돌아보는 멀더에게 내가 손가락 세 개를 펴서 흔들었더니 "네! 수요일 오후 삼시에 만나요..." 하고는 긴 허리를 택시에 구겨 넣었다... 그래, 아직은 내가 필요하겠구나... 세종로에 서있는 충무공을 향해 걸었다. 세종대왕이 자리 잡기 전이다.
*게슈탈트(Gestalt) : 독일어, 전체성을 가진 정리된 구조. 구글 사전.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