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겨울산에 오른다. 눈이 내리는 이른 아침 산은 고요하다. 길은 미끄럽지만 눈 덮인 겨울나무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보여주는 듯하다. 흥! 겨울나무가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보여준다고?
종종 생각한다. 언어는 무엇일까? 나의 사유는 얼마나 먼지를 덮어쓴 것일까? 나의 사유는 나의 것일까? 당신의 것일까? 산길을 걸으며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매우 상투적인 아름답다는 이 낱말을 대체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한 탓이다.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참 좋다!”
‘좋다’도 상투어인 걸? 어쨌거나 좋다!
온 세상이 눈이다. 바람이 분다. 나무 위에 있던 눈꽃들이 흩날린다. 겨울이 차가운 몸을 나에게 바짝 밀착시킨다. 몸을 비벼온다. 이 느낌 뭐지? 나는 멈추어 서 있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새를 바라보고 이른 아침 눈 덮인 산속에 있는 나를 본다. 나는 다시 한번 이 겨울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예쁘다”
겨울은 내 앞에도 뒤에도 나무 가지에도 하늘에도 땅에도 건너편 호수에도 와 있다. 눈과 겨울은 어느 순간 내게로 우르르 스며든다. 어느새 눈 한 뭉치와 겨울 한 자락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이질적이며 차가운 이것들은 나의 내부에서 나를 촉발한다. 눈덩어리는 나는 멈추게 하고, 놀라게 하고, 춥게 하고, 화나게 하고, 나의 동일성을 방해하며, 나를 약 올린다. 나를 침략한다. 나를 사유케 한다. ‘모든 사유는 침략’이다. 이 느낌, 나쁘지 않다.
이상도 하다. 겨울이 좋아진다. 추워서 싫었던 겨울이 왜 좋아지는 걸까? 자주 자연 앞에서 상투적인 감상에 잠기는 것은 왜일까? 나는 자연을 그렇게(감상의 대상물로) 선택했고, 자연은 내게 그렇게 허용한 걸까? 이 상투성을 넘어가야 하리. 이곳 사람들에게 겨울은 그냥 겨울이다. 잠시 집 나간 사람이 집에 돌아온 듯, 사람들은 겨울을 만나 살아내는 것이다. 추위를 참아내고 삶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거겠지. 나는 낯익은 방문객, 겨울과 잘 지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연유는 모르겠으나 겨울이 좋아진다. 저 차가움, 저 냉소, 저 침략행위, 내 집 담을 넘는 날 선 바람과 눈꽃.
니체를 생각한다. 니체에게 아름다움의 이데아 같은 소리 하면 안 된다. ‘인식의 돈 후안’이신 니체께서는 당장 한마디 하시겠지요? “이데아라니?”
니체의 작품을 읽다 보면 다소 혼란스럽다.
초기작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균형 잡힌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나 에우리피데스가 이를 망쳤다’고 비난한다. 이때 니체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균형을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 문화를 동경했던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그리스 정신의 정수로 보며 이 정신이, 황폐한 당대 독일 문화를 일깨울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3대 비극작가 중 에우리피데스가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삭제하고, 소크라테스의 진리와 이성에 오염된 작품(아폴론적인)을 쓰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리스 비극이 쇠퇴했다고. 대체로 초기 니체는 진리보다는 예술에 무게를 두고 소크라테스에 적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2>와 <아침놀>에서는 철학과 진리가 다시 강조되고 예술이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든다. 후기 작품들에서는 다시 예술의 지위가 복권되고, 아폴론을 배제한 디오니소스를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니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듯해서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이는 니체만이 아니라 걸출한 철학자들이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언어의 용법이나 사유의 전개 방식이 들쭉날쭉해서 맥락에 따라 같은 낱말이 전혀 다르게 읽히거나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매 순간 위험한 물음과 문제의 영역으로 나간다. ‘벼랑 끝에서 한발 더’ 넘어가 버리는 그의 인식은 난감하고 난해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람둥이가 온갖 여자를 겪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니체 역시 온갖 인식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도달할 수 없는 인식을 끊임없이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통과 절망에 이르도록 그를 자극한 것은 정복하거나 정지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묻고 , 구하고, 추적하는 것이었다. 불확실성, 확고하지 않은 것이 그가 사랑한 것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이토록 경이로운 불확실성과 현존의 다양성 속에서 살면서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음의 욕구와 욕망 앞에서 어떻게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자족적인 사람들을 당당하게 조롱했다. 그들이 확실성 속에서 안주하면서 그들 체계의 조개껍질 속으로 조용히 피신했어도, 위험한 급류, 모험, 영원한 황홀, 영원한 실망만이 그를 유혹했다.”
-슈테판 츠바이크 <니체를 쓰다> 중
잠시도 머물지 않는 사람 니체, 항상 경계에서 한 발 더 내딛는 사람, 맹수의 눈빛으로 문제와 물음을 던지며 ‘위험한 급류’ 속으로 한쪽 발을 뻗는 정신. 이 ‘좌충우돌’ 니체를 츠바이크는 ‘인식의 돈 후안’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묻고 문제를 제기한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문제와 물음들뿐이다(...) 문제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동일성을 박탈하고 그의 선한 의지를 깨트리는 가운데 그 영혼을 파괴하는 힘을 낳는다. (...) 모든 사유는 침략이 된다.”
-들뢰즈 <차이와 반복> 중
미셸 푸코와 함께 니체를 ‘복권’시킨 일등공신이라 할 만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서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문제와 물음들뿐이다.’ ‘문제와 물음’ 앞에서 우리는 드디어 사유하게 된다. ‘아름다운 영혼의 자기 동일성’ 속에서 사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동화된 뇌의 시스템이 정해진 회로를 따라 반응할 뿐이다. 그것은 잠자고 있는 삶과 비슷하다. 우리는 전혀 사유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습관의 힘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자동적으로 씻고 밥 먹고 회사에 출근한다. 사유가 필요 없다. 회사 일을 습관적으로 하고 퇴근 후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혹은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도 사유하지 않는다. 내 몸이, 내 발이 나를 집으로 데려다준다. 집으로 가는 동안 일일이 ‘명령어’를 사유하지 않아도 된다.
가령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리고 큰길에서 직진해.” “거기서 노란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찾아.” “거기서 멈춰.” “80번 버스를 꼭 기억해” 등등 말이다. 내 몸은 컴퓨터와 비슷해서 ‘집에 가야지’라고 입력하면 나를 집으로 데려다준다. 프로그래밍 된 회로를 돌고 있는 삶을 살면서 우리는 생각하며 산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언제 사유하는가?
질문할 때 사유한다.
“너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언제 사유하는가?
문제 앞에 섰을 때 사유한다.
뜨거운 물을 부어 넣은 컵라면을 엎질렀을 때, 앗 뜨거워 이게 뭐지?라고 비로소 뇌가 작동하기 시작된다.
오로지 ‘물음들과 문제들’ 앞에서 사유가 시작된다. 그래서 문제와 물음은 일종의 침략행위다.
문제와 물음들은 ‘아름다운 영혼의 동일성’을 파괴하고, 침략적으로, 폭력적으로 나에게 덮쳐온다. 매끄러운 내 하루를 찌그러뜨리고 내 안의 타자성을 찾는 행위, 그것이 물음을 던지며 문제를 만들며 사는 삶이다.
우리에게 <동물동장>과 <1984>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 조지 오웰은 명문 기숙학교인 세인트 시 프리언스와 이튼을 졸업한 후 대학을 포기하고 대영제국의 경찰간부로 식민지 버마에 간다. 그곳에서 자기 동일성을 지키며 ‘성공’하는 삶을 설계할 수 있었으나 그는 돌아온다. 압제자의 일원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실패만이 유일한 미덕’ 같아 보였으므로 자발적으로 파리와 런던의 노숙자 생활을 시작한다. 또 작가 생활을 하던 중에도 스페인 내전(1936-1939)이 발발하자 나치의 협력을 받는 프랑코에게 맞서기 위해 공화국 민병대 소속으로 전쟁에 참가한다. 그는 대영제국의 경찰간부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안정된 삶을 살 수도 있었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끊임없이 자신 안의 타자성을 일깨우는 삶을 살았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글을 썼던 것이다.
‘물음과 문제’가 없는 인생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잠자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부단히 타자와의 경계를 지우고 인식의 격렬함으로 들어가는 삶이란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고 문제를 만들면서 사는 것이다. 그 삶은 다소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속성이며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때 비로소 다른 것을 보게 되고 다른 인식에 이르게 된다. 다른 글을 쓰게 된다. 존재의 다른 층위를 보게 됨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삶이란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극복하는 과정의 다른 말이 아닐까? 그것이 개체의 속성이 아닐까?
나는 매 순간 침략당하고 싶다. 나의 동일성에 균열을 내고 나를 다른 배치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침략. 그것은 다른 나를 생성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난다.
모든 사유는 침략이다!
당신을 침략하고 싶다!
@ <니체와 함께하는 옆길>에서 인용하는 니체의 저서는 모두 책세상에서 나온 번역본입니다. <니체와 함게하는 옆길>에 발행하는 글은 내외뉴스통신에 게재한 글을 조금씩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