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경 Feb 25. 2019

무기력과 권태 돌파하기

도덕과 행동방식, 자연과 인간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잘 가고 있는가? 돌부리와 엉겅퀴가 길을 막고 있는가? 고단한가? 악전고투하고 있는가? 사막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가? 그 사막을 터벅터벅, 등에 짐을 잔뜩 실고 걷고 있는 낙타, 착한 낙타처럼 이 하루를 살고 있나? 목은 마르고 다리는 푹푹 꺾이고, 뜨거운 광선이 칼처럼 폐부에 꽂힐 때 주문을 외운다. 잘 가자! 잘 하자! 그런데 뭘?

   

오늘 당신은 안녕하셨는가? 뭔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삶을 전투처럼 살다가 느닷없이  눈물이 솟구친 적이 있는가? 이건 아니지,라고 생각했는가? 이 길 곧장 내쳐 가다 보면 무엇을 만날까? 나를 넘어가고 있는가? 나의 심연과 나의 표면은 같은 얼굴인가? 나의 심연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그 신호를 인지하였는가?    


차를 멈추고 재정비를  해야 하는 시점인가?    


요즘 그렇다. 화가 난다. 누가 툭 치면 화다닥 폭발할 것 같다. 뭐가 문제지! 과부하된 것은 없나? 삶의 능동성은 이루어지고 있나? 공허. 나의 욕망은 목이 마른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나? 나는 분노하고 있는가?  화가 나는가?    


낙타처럼 열심히 살고 있는 나. 나에게  박수를 쳐주면 되지 않나? 그런데 그것이 해법이 아니라고 내부에서 소리친다.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지금 정면으로 나에게 가야 할 시간. 두려워하지 말자.    


나는 지금껏 잘 살았는데 왜 느닷없이 허무한가? 뭐가 문제지? 당신도 그럴 때가 있는가? 불현듯 이것이 맞는 길인가? 의문에 잠기는가?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상황 가운데 있다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재능과 반대되는 정신적 방향으로 잘못 빠져든다.; 얼마 동안 그들은 영웅적으로 홍수와 바람에 대항하여,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항하여 투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치고 숨이 가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성취하는 것도 아무런 진정한 기쁨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성과를 이루면서 너무 크게 손실을 입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승리를 거두는 중에도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과 가능성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절망할 것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우리는 ‘영웅적으로 홍수와 바람에 대항하고, 자신에게 대항하여 투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얻은 성취가 기쁨을 주지 않는다. 이 성취를 얻기 위해 많은 것을 잃었다. 더 큰 문제는 ‘승리를 거두고 있는 중에도’ ‘미래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침내 마침내 그들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돛에 순풍이 불어와 우리의 수로로 우리를 움직여 준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얼마나 우리는 확실한 승리를 스스로 느끼고 있는가!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다. 이제 우리는 지식이 있는 자로서 우리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될 것이며 그럴 자격도 있다”

                                                                  -니체, <같은 책>    


되돌아온다! 되돌아와야 한다! 너무 멀리 갔다고 탄식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되돌아오자. 내가 되돌아온 거기, 반가운 것이 나를 반겨 준다. 내가 나를 반겨준다. 우리의 돛에 순풍이 불어온다. 순풍이 우리를 움직이게 해 준다!     


몇 번이고 되돌아오자!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자! 되돌아온 자리에서 우리는 순풍을 타고 나간다. 그것은 내가 나와 대항하던 투쟁을 멈추는 행위이며 나와 자연의 화해이며 나의 심연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며 나를  풀어놓는 행위다. 자연 안의 자연으로서 나를 바라보는 행위, 나의 무의식을 마주하는 능동성이다.    


니체는 유고 <1881 봄~1882년 여름>에서 ‘엄청나게 판이한 가치의 표상을 얻는 데에는 평가에 어떤 극도로 미세한 변화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조금만 방향을 틀어서 평가하면 엄청난 차이가 나타난다. 차이들을 생성하는 힘, 판이한 가치의 표상을 갖는 것은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치를 부여했던 것에 가치 값 0을 주자. 너무 심한가? 그래도 그렇게 하자. 그런 후 다른 렌즈를 끼고 바라보면 다른 표상을 얻게 된다. 내가 지금 아픈 것은 내게서  멀어진 때문일지 모른다. 내 안의 자연이, 너 지금 너무 멀리 가고 있어,라고 붉은 깃발을 나한테 흔들고 있는 건지 모른다. 되돌아와야 해!라고 외치는 신호일지 모른다.        


“나의 도덕 그 첫 번째 명제: 어떤 상태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복도, 자신의 평안도, 또 자기 지배도. 상태는 항상 보조적인 것에 그쳐야 하며 (...) - ”이상“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행동들을 가능한 한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또 눈에 보이도록 실행할 것! 우리를 구별하는 것은 행동방식이다.”

                                                                           -니체 유고 <1881 봄~ 1882 여름>        


니체가 싫어하는 낱말이 ‘도덕’이라는 말일지 모른다. 니체의 ‘가치 전도’는 현행 도덕에 대한 가치 전도가 일차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니체는 ‘현행 도덕’을 비판하는 것이며, 현행의 선악 개념을 비판하는 것일 뿐이다. 도덕과 윤리의 다른 지평을 니체는 열고 싶어 한다. 어쨌든 사설은 중단하자. 니체가 자기의 도덕으로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실천한 것이 위 문장의 내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니체는 어떤 상태를 추구하지 않는다. 가령 행복한 상태, 평안한 상태, 자기 지배 상태..... 니체는 상태가 아니고- 상태는 보조적일 뿐이며- 행동들을 한다. 행동들, 소소한 행동, 큰 행동, 뾰족한 행동, 동그란 행동, 이런 행동, 저런 행동. 그것들을 눈에 보이도록 실행하는 것이다. 그 행동들을 숭고하고 아름답도록 행하는 것이다. 행복한 상태가 목표가 되면 이 상태는 우리를 눈멀고 귀 멀게 할 수 있다. 아름답고 숭고한 행동들의 실행을 막을 수 있다. 해서 니체는 어떤 상태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춘다. 니체와 니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은 행동방식들 하나하나다.        


행동들 하나하나는 나를 행복상태로 머물게 하지 않을 수 있다. 행동들 하나하나는 나를 위험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그것이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라면 행동들은 행동들을 감행한다. 사실 행동들은 주어가 없는 행동 작용이다. 그것이 나를 살아있게 한다. (나라고 이름 붙인 흐름으로서의 나를) 그것이 자연인 나의 본래의 건강성이다. 자연은 위험을 모르고, 안일과 성공과 명예를 알지 못하며 자기 방향으로 간다. 가야 할 곳으로 간다. 작용하고 작용받고 소멸하고 생성한다. 인간은 자연이다. 해서 내가 아프다면 나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쉬기 위해 오래 누워있는 것이 처방이 될 수 없다. 내 안의 자연의 꿈틀대는 힘을 억압하지 않고 풀어내는 행위. 그것이 처방 일지 모른다. 낙타의 등짐이 나에게 버거운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니체적 의미의 아름답고 숭고한 행동들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 의식적으로 내다 버린 때문인지 모른다. 니체적 의미의 ‘천민적인’ 이해타산적인 생존만을 위해, 무의미한 행복상태를 위해, 그 안에다가 나를 던져 넣어 둔 때문인지 모른다. 안일과 타성과 무기력과 노회함의 무한 공전. 그 컨베이어 벨트 속을 열심히 달려온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 소진되어 버린 게 아닐까? 너무 오래  행복을 외쳐대며 행복상태를 갈망하며 나를 ‘쉬게’ 한 게 아닐까? 공회전시킨 게 아닐까? 그러니 위험한 영역으로 탈주하라고 내 안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이다. 탈영토화. 너의 지금의 영토 밖으로 좀 나가봐! 이 불쌍한 중생아! 내 안의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어머니가 나에게 고함친다. 너 지금 힘들어 보이는구나! 제발이지 좀 위험하게 살아라!! 등짐일랑 내려놓고 호랑이와 맞짱 뜨는 배짱으로 세렝게티 평원에 나가 한바탕 마라톤이라도 좀 하렴! 그럼 네 안의 자연이 포효하며 일어날 것이다. 네가 살아있다는 표식이 파도처럼 내 귀에 쏟아질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박수소리라는 선물이다.         


되돌아온다. 몇 번이고 너는 되돌아온다. 네가 돌아오면 하늘과 땅과 꽃들이 네가 눈이 멀 정도로 부신 행복들을 네 앞에 던질 것이다. 이때의 행복은 이전 것과는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너의 돌아옴을 자축하는 축제. 축제에서 자연은 너에게 햇살과 빛과 꽃잎과 바람이라고 쓰인 돈을, 세상의 돈보다 훨씬 향긋한 자연의 돈을 너에게 마구 던진다. 햇살과 바람과 공기와 하늘과 나무와 꽃잎이라는 풍성한 돈이 너에게 쏟아진다. 그런데 웬 돈? 지상의 인간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돈이라는 표상이므로 자연이 주는 선물을 돈이라는 표상으로 내가 심심해서 이름 붙여 본 것이다.         


지금 내가 우울하다면 아름답고 숭고한 행동을 한 가지 해보시기 바란다. 위험한 행동을 단 한 가지라도 해보시기 바란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떤 행동을 해보시라. 평소 해보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것을 해 보시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빼고 내가 뿌듯함을 느끼는 무엇을. 역설적 일지 모르나 이것이 나를 치유해줄 것이다.         


게으르게 드러누워 “잠깐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하지 마시라. 일어나서 호랑이처럼 위험하게 달려보자. 순치되었던 내 야생의 에너지가 폭발할 듯 솟구쳐 나올지 모른다, 그때 자연이라는 박수부대가 박수라는 돈을 쨍그랑 쨍그랑 치면서 웃고 있을 것이다. 야호 야호 하하하... (무거운 이야기 하면서 자꾸 웬 돈타령? 여러분도 나도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돈이라는 놈이 내 무의식을 비집고 이 글 속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지분을 요구하는 것 같다. 어이구, 이 돈 같은 놈아, 어여 썩 꺼지시라! 쨍그랑 쨍그랑 돈이 나를 놀리면서 퇴장을 거부한다. 우헤헤헤)
     

“인간! - 가장 겸손한 사람이 자연과 세계 속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느끼는 허영심에 비하면 가장 허영에 찬 인간이 가지는 허영심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때 우리 자신은 잊어버린다.: 우리 자신도 자연이라는 사실을-따라서 자연이란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자연과 구분하여 자기를 인간이라고 분류, 명명하는 허영심에 대해 니체는 웃는다. 인간의 특이성이란 자연의 한 조각일 뿐. 홍수와 바람, 자기와 대항하는 어리석은 투쟁을 멈추고 자연의 흐름 속에 나를 맡길 때 나는 순풍을 타고 나의 수로로 나간다.        



나의 시 한 편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    

나는 프라이팬에 일없이 기름을 두르고

절망을 볶아낸다

노릇노릇 구워진 절망을 삼키며

그래 구체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만 진짜구나

감기약을 먹으면 아픈 내가 진실일까

어제는 프라이팬에 남아있는 절망의 부스러기를

내다 버렸지

쓰레기 봉지에 쏟아버린 숱한 물음표를 찾아보았지

지금 등 굽은 해가 고름처럼 줄줄 쏟아지고

병든 얼굴로 웃고 있어

(누런 색, 햇살의, 망측한 얼굴 좀 봐)

네 연락처를 알 수 없구나

길을 걷다가 한 번만 만나고 싶어

차가운, 네 손 한번, 만져보고, 기관지가

터지도록 쿨럭거리고 싶어

플래카드를 내다 걸고 너를 수소문한다

쫓아내고 싶은 내 방의 따뜻한 햇살

겨울의 퇴폐한 안락의자    


-천경 시, <겨울 감기> 중. (시집, <고독 혹은 빨강색에 대하여>에 수록)

이전 04화 과거와 작별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