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누구나 방귀를 뀌고 산다. 그런데 왜 방귀 생각을 하면 혐오스럽고 불편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눈발이 날리기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근처 산에 갔다. (지금부터 조금 민망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노인 한 분이 일찌감치 운동 후 산에서 내려오신다. 마주치면 종종 목례를 했던, 안면이 있는 분이다. 고개를 들어 저 앞에서 오시는 노인에게 인사를 하려는 찰나, -나를 못 보신 것 같다. - 갑자기 뿌웅~ 냅다 방귀를 뀐다. 무안해져서 고개를 얼른 돌렸는데 내친김에 2회 더 뿡 뿌웅~ 한다. 그리고 그냥 지나가신다. 나를 발견한 순간, 이미 ‘사건’이 터진 후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득 오래된, 방귀에 얽힌 기억이 떠올라서 혼자서 킬킬킬 웃으며 산길을 걷는다.
고즈넉한 겨울 산길을 걸으며, 떨어진 낙엽이 새로 태어날 어린잎의 거름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겨울 산에서 방귀에 대해 생각한다.
결혼 전 직장 동료, 남자가 있었다. 이 동료, 뭐랄까? 한마디로 멋진 남자다. 자칭 ‘음유시인’인 그는 술자리에서든, 식사시간이든 재미있는 말을 잘해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는다. 게다가 일에 대한 열정과 공부하는 자세가 보기 좋은 사람이다. 유머가 풍부하고, ‘지적 천착’에도 힘쓰는 유형. 외모 또한 봐줄 만한 하다. 동갑인 나는 여럿이 함께 그의 기상천외한 관찰과 달변에 웃기도 많이 하고, 잘못된 ‘고찰’에 대해서는 지적도 서슴지 않았다.
한마디로 편하고 좋은 직장동료. 어느 날 이 사람,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방귀를 뀌는 거다. 순간 이 사람이 너무 지저분하게 느껴져서 ‘예의 좀 지켜요?’ 농담 섞어 핀잔을 주고, 멀찍이 떨어져 다른 사람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이후로 이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모두 구린내 나는 것 일색으로 연상되는 거다. 게다가 우습게 까지 보인다. 괜찮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는데, 방귀 한 방 때문에 냄새나는 이미지가 오래 지속됐다는 얘기다. 누구나 뀌는 방귀 한번 뀌었다고 저 사람을 내 동료의 목록에서 빼버리고 싶고, 구린내 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건 심한 반응인 듯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나는 결혼을 하고 퇴직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방귀의 ‘강적’을 만났다. 방귀의 달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사람을. 그곳 잡지의 편집장 일을 하던 나의 작업공간과 윗사람인 그의 공간은 칸막이로 구획되어 있었다. 이 분은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이 큰 소리 나는 방귀를 뀌어대는 거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속으로 많이 웃었다. 세상에, 업무와 관련해 나와 둘이서 논의를 하는 중에도 냅다 방귀를 뀐다. 종종 냄새까지 구릴 때는 진짜 짜증이 난다. 그런데 그 사람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다. 의당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듯, 아니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냈는지 개의치 않는 태도다. 그가 그런 식이니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넘길 수밖에.
동료들에게 그의 방귀에 대해 말했더니 원래 방귀 잘 뀐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하니 나처럼 고초를 당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의 전임자가 사직한 것은 방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어느 날부터 그의 방귀 소리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실수로 방귀를 뀐 멋진 동료가 우습게 보였는데, 지금은 이 윗사람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대놓고 하루에도 최소한 2차례 이상 방귀 소리를 들려주나 싶어서. 방귀 소리에 자꾸 민감해졌다. 항의를 할까, 생각했지만 그건 나를 더 우습게 만드는 것 같았고 화를 참는 것도 짜증 나고.(어떤 날은 줄방귀를 뀐다. 나는 별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줄방귀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주위를 의식하고 조심하는 방귀소리와 다다다닥~ 거리낌 없이 내뿜는 뻔뻔한 소리를 구별할 수 없겠는가? 이 인간이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나를 화나게 했다.)
머리를 싸매고 방귀 달인을 혼 내 줄 방법을 혼자서 끙끙 거리며 연구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회사에 정식으로 항의하기도 그렇고, 00님의 방귀소리 때문에 일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방귀에 대해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내가 한심하기도 했다.
그러다 손뼉을 치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나도 맞방귀를 뀌자! 그럼 미안해하겠지.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방귀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일을 했다. 그런데 결심을 하고 나니 방귀가 더 안 나온다. 막상 방귀가 나오려고 하면 습관적으로 참게 되고, 소리가 아주 작고.
며칠을 애태우던 끝에 약이 바짝바짝 오른 나는 드디어 한 방 터트렸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창피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얼굴 화끈거리고 화가 났다. 그래도 그의 방귀는 멈추지 않았다. 나도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업무와 관련해 얼굴을 맞댈 일이 1주일에 한 번은 있는데 내 방귀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한 이분,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야릇하다. 기분이 나빴다. 자기는 하루에 적어도 2회 이상 뀌면서 나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다. 난 네가 방금 전에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이런 표정으로. 기가 막혔다. 내일은 더 큰 방귀로 이 사람 기를 꺾어 놓아야지, 생각하며 퇴근했다.
그런데 그와 방귀를 트고 지내던 어느 날, 이게 아닌데 싶었다. 나의 이미지가 엉망이 된 것 같아서 괴로웠다. 이제 방귀 트고 지내는 것, 그만하자, 고 결심했다. 방귀에 대한 신경전으로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그의 커다란 방귀소리를 음악소리처럼 들어주는 도인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내가 그의 방귀소리에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낸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날마다 정직한 배설기관의 소리를 한 두 차례는 꼭 들려준다. 참 낯짝도 두꺼운 사람이야. 부글부글 속을 끓이다가도 그의 표정이 평온할 뿐이어서 내가 과민했나, 하다가, 방귀를 트고부터 야릇하게 웃는 것 같던 그의 얼굴이 하루도 여러 번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괴로웠는데, 업무적으로나 회식에서 보면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회식자리에서도 종종 방귀소리를 내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고, 곧 시끄러운 잡담 속에 묻히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방귀소리를 시끄러운 술좌석에서도 잘 듣는다. 평소에 단련된 탓이다! 문제는 회식에서는 방귀소리가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내 분한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약이 올랐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지냈게 됐는데 갑자기 오늘 방귀에 얽힌 지난 기억이 떠올라서 적어본다.
인간은 누구나 방귀를 뀌고 배설하는 동물인데 내가 좀 까탈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을 왜 부끄러워해야 하나 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하지만 심한 냄새를 풍기는 건 피해를 주는 거니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방귀도 뀌고 똥도 오줌도 싸는 유기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분노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의 방귀 소리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화가 났다.
위 내용은 몇 년 전에 나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니체를 읽다가 이 글이 떠올랐다. 빡빡한 삶에서 벗어나 한번 웃어보자, 라는 생각에 어법 등을 좀 수정해서 싣는다. 니체가 웃음을 추천하는 것에 눈이 번쩍 열린 것은, 실은 내가 잘 안 웃는 인간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웃음을 긍정한다. 프로이트는 유머를 긍정적인 방어기제로 본다. 웃음은 세상의 고귀함과 성스러움을 조소하고 무화시킨다. 웃음은 해방시킨다. 웃음은 도약하게 한다. 웃음은 진지한 담론도 거대한 무거움도 즉시 날려버린다. 거짓들은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를 것이다. 모든 분리와 차별의 틀을 지운다.
중세에는 웃음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세 성직자들의 근엄한 얼굴을 떠올려 보라. 창조주 하느님이 만들어 준 얼굴을 변형시키면 안 된다! 중세에는 웃음도 학문도 과학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젠 웃자. 웃음은 세상 근심을 소거하고 유머와 여유를 가져다준다. 웃음은 진리를 날려버리는 진리다. 낙타도 사자도 웃을 줄 모른다. 낙타과 사자를 경유해온 어린아이만이 웃는다. 등짐을 잔뜩 실은 낙타가 사막을 터벅터벅 걸어갈 때, 아이는 사막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대양 앞에서 깔깔깔 웃는다.
웃음은 상승시킨다. 웃음은 경쾌하다. 웃음은 높은 곳으로 솟구친다. 웃음... 하늘에 웃음꽃이 핀다. 웃음의 꽃은 색깔이 다양하다. 웃음의 종류만큼 웃음의 꽃들이 각각의 자태로 웃는다. 웃으면, 사는 것 별 것 아니다. 심각할 것 없다. 나는 웃는다. 15분간. 참새에게 별에게 파리에게 바람에게 창문에게 공기에게 사슴에게 청설모에게 지렁이에게 고목에게 슬픔에게. 나에게 웃음 편지를 쓴다. 웃음. 무지개.
예전 언젠가 휴식을 취하려
나무 그늘 아래 앉았을 때
나는 들었네, 나지막이 똑딱거리는 소리를.
장단을 맞추듯 우아한 소리였지.
화가 나서 얼굴을 찌푸리다가
마침내 마음을 돌려
심지어 스스로도 시인처럼
똑딱 장단에 맞춰 말하게 되었지.
이렇게 시구를 만들어가며
한 구절, 한 구 절마다 네 장단과 함께 뛰어 노노라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웃고 또 웃었지
15분간이나.
네가 시인이라고? 네가 시인이라고?
네 머리가 그리도 멍청하단 말이니?-
“네, 그래요! 당신은 시인이랍니다.”
-딱따구리는 이렇게 말했지.
-니체, 즐거운 학문, <새의 판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