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경 Jan 31. 2019

신은 죽었는가?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매년 성탄절 즈음이면 가톨릭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받는다. 모든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제의다. 고해성사는 연 2회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 즈음에 진행된다. 고해실에 들어가기 전 성찰할 내용을 미리 받는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 나와 나 자신의 관계, 나와 가족, 이웃과의 관계 등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고백한다.     


머릿속으로 한 해 동안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 나와 나 자신의 관계, 나와 이웃의 관계, 나와 가족의 관계... 열심히 성당에 나갔고 열심히 기도했으며, 여러모로 도덕교과서 같은 단조로운 삶이라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웃이나 지인과의 관계도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이루어지니 문제 될 것이 없는듯했다. 남은 것은 가족과의 관계다. 옆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가족 관계에서 분노하고 미워하고 갈등한 적이 없는가?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생각해야 할 지점이다.    


심각하게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있는데 내 차례다. 다행이다. 본당 주임신부임이 아니고 근처 성당 신부님 쪽 고해실로 들어간다.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있는 본당 신부님에게는 쑥스럽다. 가림막이 있어도 누군지 금방 알 수 있다. 모르는 신부님이니 진솔하게 속엣말을 해도 될 듯했다.    


미셀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오트 르망, 난장 펴냄)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성사 제도가 없었고 신자들끼리 서로 성사를 해온 것으로 나타난다. 성사 제도는 11-12세기부터 발전해 의무화, 보편화됐다고 한다.     


아무튼 올해는 운이 좋다. 나는 조심조심 고백을 시작한다. 가장 걸리는 부분,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야 하는 대목에서 숨 고르기를 한다.    


“저는 남편에게 자주 짜증을 냈고, 만만한 딸에게 훈육이란 명목으로 소리 지르고 화를 많이 냈습니다. 고양이한테도 화를 많이 냈습니다. 고양이가 놀아달라고 옆에 오면 겁을 주어 쫒아버렸고 딱밤을 때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심심할 때는 고양이와 놀고, 내가 바쁠 때는 고양이에게 화를 냈습니다. 고양이가 소파에 똥을 싸면 화를 냈고....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뉘우치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신부님은 반응이 없으시다. 웃음이 나셨나? 내가 고양이한테 화냈다고 고해한 것이 신부님을 웃게 했나 싶다. 고해를 마치고 나오는데, 신부님도 나오신다. 다음 차례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다. 내내 쉬지 못하고 진행했으므로 화장실에라도 가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가면서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나가신다. 심각하고 진지한 어조로 고양이에게 화낸 것을 고해한 중년 여인이 어떻게 생겨먹었나 보고 싶었나 보다.    


신부님을 웃기려고 고양이에게 화낸 것을 고해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웃이나 지인들에게는 예의를 지킨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종종 화를 내고 자식에게는 매우 편하게 화를 낸다. 고양이에게도 화를 잘 낸다. 가죽소파를 뜯어 놓았을 때, 책장의 책을 물어뜯어놓았을 때, 똥을 소파에 싸놓을 때 화가 난다. 그런데 딸과 고양이 중에 누구에게 더 화를 많이 낼까?  상황마다 다르다.    


고양이가 물을 엎지르거나 밥을 쏟았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한다. 그러나 딸이 실수하면 몹시 화를 낸다. 주의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아서다. 화는 딸에게 더 내지만 고양이를 더 무시한다.     


고양이 앞에서라면 옷을 훌러덩 벗고 다니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누구와 전화통화를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 앞에서는 못할 농담도 한다. 몸가짐에도 조심성이 없다. 아줌마 원피스를 입고 운동한답시고 다리를 쫙쫙 벌리거나 치켜들고 텔레비전을 본다. 물론 건너편 아파트를 의식해서 블라인드는 내린다. 무시한다는 것은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 아닌가. 고양이는 없는 것이다. 고양이는 존재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그렇게 행동한다. 놀아달라고 귀찮게 하면 겁을 준다. 딱밤을 한 대 때린다. 나는 나의 이런 행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사람과 고양이와 강아지를 차등하며, 약한 동물에게 무심하고 들쭉날쭉한 성품을 노출하는 것이 걸렸다.   


 딸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양이에게 화내는 법이 없다. 예쁜 고양이 예쁜 고양이 하며  쓰다듬는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손을 할퀴어 피가 나는데도 ‘으이구’ 한마디 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고양이에게 화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웃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죽고 못 살 정도로 애지중지한다. 자식처럼 품에 안고 다니며 자랑하고 금지옥엽으로 키운다. 나는 그것이 의아하다.    


나는 자식도 금지옥엽으로 키우지 않으며 고양이는 딸이 좋아해서 어쩔 수 없어서 키운다. 같은 실수를 타인이 했을 때는 잘 참아주면서 딸에게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훈계하고 화내는 내 성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털이 복슬복슬한 착한 고양이에게, 사랑받으려고 저토록 애쓰는 작은 고양이에게 무심한 나에게 의문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이 부족하구나!

나는 내게 사랑이 넘치기를 희망하며 기도하곤 했다.

나는 자주 이런 나의 특성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은 성당에 안 간다. 니체를 읽어서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안 가는 것이다.  게을러진 때문이다.  봄이 오면, 혹은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나갈 것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으나 나는 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존재의 미망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싶을 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기독교인데 니체에 의하면, 아니 니체가 아니라도 인류의 문명사를 보면 기독교가 지탄받을 짓을 많이 했다. 기독교가 저지른 과오 앞에서 나는 종종 할 말을 잊는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신은 죽었는가? 니체의 말을 들어보자.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들도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난 자는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역사보다도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니체, <즐거운 학문, 125>    


이어진문장에서 니체는 ‘신이 죽은 사건은 아직 방황 중’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알려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또한 ‘신을 죽인 행위를 위대한 행위’로 평가한다. 그런데 신을 죽인 것은 그들의 짓이고, 그들은 바로 교회다. 이 책 125절 마지막 문장은 ”이 교회가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라고 외친다. 이렇게 외치는 자는 광인이다. 광인은 차라투스트라이며 이 문장은  차라투스타라의 출현을 예고하는 문장으로 해석된다.    


즉 신을 죽인 행위는 위대한 행위지만 정작 신을 죽인 자들은 교회라는 점이다. 교회가 그 책임자라고. 교회의 잘못된 여러 행태가 신을 죽이고, 인간이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유를 얻었다. 중세 이래 기독교의 행태, 교회와 사제의 행태가 정작 인간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이라는 진단이 눈여겨 볼만하다. 내가 지키려고 움켜쥔 것이 오히려 나를 파괴하는 힘이 되는 아이러니. 이런 아이러니는 삶에서 자주 접한다.  해서 움켜쥔 손을 펴고, 자기를 비우면 행복해진다는 엇비슷한 담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랑이라고 믿고 내 아이에게 ‘온갖 사랑’을 베풀었으나 그것이 독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또 나를 위해 나에게 한 짓이 나에게 해가 되기도 한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우리가 신을 죽였다-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 이제 지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모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일까? 무한한 허무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허공이 우리에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밤과 밤이 연이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니체, <즐거운 학문, 125>    


신이 죽었으니 이제 인간은 방황한다. 끊임없는 허무감에 젖어 있을 것인가? 신이 죽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은 죽었다’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전문가들은 신의 죽음을 기준이나 척도의 사라짐으로 해석한다. 즉 보편 진리, 절대정신 등이 사라진 상황. 플라톤 이래 주유했던 전통 형이상학 세계에 대한 종언 선언이라고.     


신이 죽었으므로 신의 자리에 이제 인간이 들어오게 된다. 인간이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사유가 혹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휴머니즘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기존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수직적 위계의 최상으로, 즉 신 다음의 자리에 배치했다면 니체는 인간을 자연의 한 조각으로, 생성의 존재로 본다. 


어쨌거나  이제 내가 내 인생의 창조자가 된 것이다.

우리 자신이 삶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    


이 상황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런 카오스는 곧 복음(福音)이 된다.  인간을 옥죄었던 신이 사라지면서 새 세상이 열리는 혼돈이다. 같은 책 108절에서는 ‘부처가 죽은 후에도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엄청나게 크고 두려운 그림자를 보게 되는데 우리는 그 그림자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신은 죽었다’고 니체는 말한다.    


신의 죽음, 이 죽음 위에 초인이 탄생한다. 신이 죽었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면서 초인으로 살 수 있게 된다. 초인(위버멘쉬, overman)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인간을 넘어선 인간, 자신을 극복한 자신,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인간 등등.    


위버멘쉬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이다. 자유정신의 소유자. 자기를 넘어선 존재. 위버맨쉬는 어린아이 같은 긍정의 인간이다. 낙타와 사자의 삶을 통과해 온 인간 위의 인간.    


세상에는 자유정신의 대양이 펼쳐진다. 천 개의 긍정과 천 개의 진리와 천 개의 가치와 천 개의 꽃들과 천 개의 비도덕과 천 개의 관점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초월적 존재에 의지 하지 않고 무한 긍정의 삶을 사는 초인의 세상. 그 세상에는 무수한 길이 펼쳐져 있다. 그 길 위에서 고통을 긍정하며 명랑하게 사는 초인. 무한 긍정의 어린아이.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 세상은  새롭게 반복된다. 영원회귀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른다    


네 옆에는 네가 가지 않은 무한개의 길이 있다.  네가 가지 않은 무한개의 모르는 세계가 있다. 무한개의 견해와 무한개의 사랑과 무한개의 슬픔과 무한개의 고통과 기쁨이! 그것은 게슈탈트 전환처럼 전혀 다른 세상이다. 이제 세상의 풍경이 통째로 바뀐다.        


이전 07화 죽어서 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