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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경 Jan 25. 2019

결혼, 부모가 된다는 것

■천경의 니체 읽기 칼럼

최근 이혼소송 중 신변을 비관해서 생후 21개월 된 아들을 살해한 여성 이야기가 한 매체에 보도됐다. 연일 터져 나오는 굵직한 뉴스들 뒤에 가려진 ‘작은 사건’이다. 얼마 전에는 ‘고준희 양 실종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범인이 부모로 밝혀져서 충격을 주었다. 또 부모가 어린 아들을 강아지 목줄로 묶어 벌을 주다가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이제 나는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족을 의심하게 된다. 가족이 범인으로 종결되는 사례를 자주 보아온 때문일 것이다.                        


종종 생각한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함부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닐까? 자식 많이 낳으라고, 저출산 고령화가 문제라고 하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두렵고 준엄하며 성스러운 무엇임에 틀림없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삶으로의 진입이다. 한 생명을 떠맡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해결되지 않은 개인적 심리적 문제는 자식에게 대물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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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성격과 성향에 관련된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은 어린아이의 본질 속에서 계속 울리게 되고 그의 내면적인 고뇌의 역사를 형성한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379>                    


니체는 철학자 이전에 탁월한 심리학자로 자주 언급된다. 그만큼 니체의 저작들에서는 프로이트 못지않게 심리적 통찰이 뛰어나다. 일설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니체의 어떤 문장을 읽다가 자신의 생각과 흡사한 것에 놀라서, 얼른 책장을 덮어버렸다고 한다. 프로이트보다 약간 앞 세대였던 니체의 문장들에서는 인간에 대한 예지가 빛난다. 종교의 발생, 문화, 정치, 예술, 역사의 기원을 다루는 곳에서도 심리적 통찰이 번뜩인다. 니체의 계보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부모의 성격과 성향의 어떤 문제들은 고스란히 자식의 내면에 고뇌의 역사를 형성한다는 니체의 진단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유전자가 자식에게 나의 어떤 형질을 실어 나른다. 나는 ‘부모 되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는가? 그저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자식 낳는 것이 우리네 삶의 자연스러운 스케줄이다. 이 스케줄 표를 무심하게 쫒아가는 것이 현대 사회의 병리현상을 가속시키는 것은 아닐까? (요즘은 이 스케줄 표를 무시하고 진행되는 ‘사랑 행각’이 예기치 않은 생명을 출산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미혼모, 미혼부의 탄생.)            


나의 결함과 무능과 뾰쪽함과 어리석음과 못나고 구부러진 성정, 나의 열등감과 참담함, 나의 자만과 우월의식, 나의 모든 것이 아이에게 가서 박힌다. 그런 나는 그런 모습으로 내 자녀를 길러낸다. 그리고 공치사한다. 낳아주고 입히고 먹이고 키워놓았더니 부모 고마운 줄 모른다고 호통 치신다! 나 원 참, 아이가 당신에게 낳아 달라고 하소연했는가? 당신이 선택해서 어린 생명을 낳았으면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지 그게 뭐 대단한 선행이라고 고마운 것 모른다고 하소연하는가?                    


그런 부모가 되지 말자! 무심히 던져진 실존 앞에서 고독하고 두려운 이 삶을 우리는 걸어가고 있다. 내가 내 부모에 의해 세상에 던져져서 기우뚱기우뚱 살아왔고 내 자식 역시 그렇다. 그러니 부디 내리사랑을 기억하고 낳아주었더니 고마운 줄 모른다는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는 하지 말자!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낳아달라고 했는가? 당신은 그냥 낳은 것이고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며 삶의 한 도정일뿐이다.                    


당신을 낳아준 부모가 당신을 낳아준 것에 대해 큰소리치는 것이 부당하듯이 당신 역시 그렇다. 부모님 은혜 운운하는 것은 부모인 우리의 콤플렉스의 반영은 아닐까? 내가 이렇게 힘들게 니들 낳아 키웠으니 니들은 고마움을 알아야 해! 얼마나 낯 뜨거운 발상인가? 이 이데올로기는 부모인 우리가 퍼뜨린 것이다. 차라리 낳아서 고생시키서 미안해!라고 말하자! 흥! 나는 내 부모에게 그런 말 못 듣고 자랐는데, 여태까지 불효자 콤플렉스에 짓눌려 살았는데, 내 자식에게 공치사 좀 하기로 그게 대체 어떻다는 거지?                 


그래도 공치사는 우리 대에서  멈추자! 낳아서 잘 키운 후, 잘 살면 감사하면 된다. 잘 못살면? 그땐 반성해야 한다. 윗세대인 우리가 아랫세대에게 강요하기 위한 것이 효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지탄받겠지만 부모 노릇 생색 그만 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다만 어리석은 부모였던 나로 인해 고통받았을 자식의 안녕을 묻자!                    


몇 해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객의 갑질과 감정노동자들의 우울증이 사회적 이슈가 된 시기였던 것 같다. 어떤 음식점의 업주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고 쓰인 유니폼을 입고 일하게 한 것이 화제가 됐다. ‘고객은 왕’과 같은 언설보다야 진일보한 사고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언론에서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열렬히 기사화했을 것이다. (물론 이 업주의 동기는 훌륭하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이란 무슨 뜻일까? 비록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나는 남의 집 귀한 자식이니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나도 남의 집 귀한 자식이니 갑질일랑 하지 마세요. 당신도 남의 집 귀한 자식이듯 나도 남의 집 귀한 자식이에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나의 존엄성을 당신에게 파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도 집에 자식이 있잖아요.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좋은 아이디어네. 한데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메시지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우리는 대부분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이다. 그런데 모두가 남의 집 귀한 자식일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자기 집의 귀한 자식이라고 생각할까?                 


만약 내가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길러졌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귀한 자식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의 집 귀한 자식’이란 메시지는 이 사람에게는 상처로 다가올 것이다. 한 번도 자기 집에서 귀한 자식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이 문구를 보았을 때, 어떤 감정이 스칠까?                    


남의 집 귀한 자식이 아닌 나는 갑질 당해도 된다는 것일까?  혹은 나도 실은 우리 집 귀한 자식이었을 거야,라고 자기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감정을 강요해야 할까? 이 문구는 바꿔야 하리라. 다른 어떤 것으로.                    

자신을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어쩌면 갑질을 당하더라도 딛고 일어설 탄력성이 있다.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성장했으므로, 부당한 일을 겪어도 의연해질 힘이 있다. 정말 문제는 남의 집 귀한 자식이었던 적이 없던 어떤 사람, 그 인원이 인구의 매우 적은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이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풍토가 선행돼야 한다.                    


예를 들면 부모가 버려서 보육시설에서 자란 사람들, 이혼한 가정의 자녀(부모 중 한 명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조부모에게서 자란 사람들, 부모의 방임이나 폭력, 편애 등을 경험한 사람들 등등 어떤 이유든 귀한 자식이 아니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문구,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글을 보면 절망할 것이다. 나는 내 부모에게 귀한 자식인 적이 없고, 부모의 골칫덩어리 문제아일 뿐이니, 사회에서도 귀히 대접받을 수 없겠구나!  그는 부모에 이어 사회적 폭력에 다시 주저앉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부모인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자식을 키웠다고 자만하지만 자식들은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모인 우리가 저지른 폭력에 대해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식은 기억하고 있다.                     


니체는 말한다. ‘한 인간을 평가하는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이 부모’라고. 부모는 자식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해 잘못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고.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423>                    


부모 되기를 고민하자. 부모가 된다는 것은 큰 실험이며 도전이다. 부모가 될 자신이 없다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둘러 결혼하고 애국자가 되기 위해 서둘러 자식 생산하지 마시길 바란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무상의 ‘노역’과 희생을 즐거이 해야 하며, 개인 아무개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요구한다. 수고하고 책임지며 참아야 하며 부처님의 자기 수행에 버금가는 정신의 수양을 필요로 한다. 다른 단계의 인생의 장(場)이다.        


지금껏 부모들은 그냥 부모 되는 줄로 알았고, 자식은 그냥 자식이 되었으므로 상처 받으며 자랐다. 이제는 다른 부모 되기를 사유하자. 다른 종류의 부모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와 똑같은 자식을 생산하고 키울 것이며 그 자식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후대를 길러낼 것이다.                    


부모 되는 공부를 하자! 이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부모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란다. 자식을 낳는 일을 엄숙하고 진지하게 실행하시길 바란다. 결혼을 앞둔 청춘들이여! 명심하시라. 당신의 미성숙을 자녀에게 대물림하지 마시라!                                 

                  

니체의 문장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그들은 비천하게 생각하고 겉치레와 거짓을 따르는 아버지를 거역하고 자신들의 의향을 관철시켜야만 하거나 바이런 경처럼, 끊임없이 어린아이 같고 화내기 잘하는 어머니와 싸우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한 것을 체험했다면, 사람들은 평생 동안 한 사람에게 가장 크고 가장 위험한 적이 과연 누구였던가를 알게 된 사실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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