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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May 30. 2024

발트 연안 세 나라

- 바르샤바 짧은 자유시간

구시가 광장에는 인어상이 있었다. 목에 노란 수건을 건 소년소녀들이 인어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해맑고 천진한 아이들은 늘 반갑고 예쁘다. 바르샤바의 아이들 역시 참 예뻤다.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광장을 더 들어가면 옛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의 출입문 바르바칸이 나온다.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여기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땐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행히 성벽을 따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인어 커플의 조형물도 있었다. 어디든 그렇지만 도시 설화는 여러 버전으로 전해진다. 바르샤바의 인어 역시 다양하게 변주돼서 각기 다른 조형물이 도시 곳곳에 놓여 있다. 성채에는 인어 설화의 한 이야기 주인공 '바르'와 '사바'가 앉아 있었다.




정말 날이 좋았다. 성곽 아래 난 길을 걸어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도미니코회 성당이 있었다.히야친타 성당에 들어갔을 때, 실내의 빛에 익숙해지기 전에 저멀리 제대의 사제가 보였다. 미사 중이었다. 너무도 간결한 전례가 고요하고 깊었다. 번잡하게 하는 어떤 것들도 끼어들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앞쪽의 측랑에 하느님의 자비 성화가 보여서 나아갔다. 파우스티나 성녀의 작은 성화도 아래 놓여 있었다. 처음으로 초에 불을 켰다. 오후 한 시경. 그들은 또 다른 세계에 머물렀다. 아주 잠시 그 세계에 발을 담그고 돌아섰다. 눈이 환해지는 파스텔톤 건물들 사이에 그런 세계가 또 있었다. 




지금은 국가기록보관소로 쓰이는 라친스키 궁전에는 얀 3세 소비에스키 국왕 선출 기념일 35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바르샤바 봉기 때 나치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한 시민들의 유해가 당시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 지하에서도 적나라했다. 



라친스키 궁전을 지나 또 다른 성당에 들어갔다. 입구 벽에 기념 명판들이 붙어 있었다. 오랫동안 폴란드가 가톨릭국가로 이어지다보니 국가의 희로애락이 교회 안에 함께 있었다. 이 성당(Field Cathedral of the Polish Army)은 나중에 알고 보니 생각보다 유서 깊은 곳이었다. 1642년에 지어졌다가 스웨덴전쟁 때 파괴되었고, 다시 지어진 후 1834년에는 러시아정교회가 되었다. 1916년 가톨릭교회로 돌아온 후 폴란드 군 대성당으로 이어져 왔다. 이 성당 역시 바르샤바 봉기 때 독일군의 타깃이 되었고 결국 파괴되었다. 



성당 안에는 카틴학살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경당이 있고, 학살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가다가 스몰렌스크 근처에서 추락한 비행기 사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명판도 있다. 길 건너 크라신스키 광장에는 바르샤바 봉기 기념비도 서 있었다. 걸음 걸음마다 아득한 역사의 한순간들을 지나오는 바르샤바 구시가였다. 





가이드가 비아위스토크까지는 함께할 줄 알았는데 점심 먹고는 헤어졌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오가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았다. 좀 뜬금없을 줄 알지만 그래도 물어보았다.     

"문화과학궁전에 '페트라르카와 라우라 벤치'가 있다고 하던데요, 바르샤바에 그들의 벤치가 왜 있는지 혹시 아세요?"     

무척 궁금한 일이었다. 페트라르카와 라우라를 기억하는 공간이 바르샤바에 왜 만들어졌을까? 누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하늘에 있는 페트라르카는 죽어서라도 라우라와 함께 기억해주는 폴란드의 '그'를 무척 고마워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는 그런 벤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이야기도 알지 못했다. 버스에 타야 해서 급히 한마디만 덧붙였다.     

"한 번 알아봐 주세요. 그의 사랑이야기도 단테와 베아트리체 못지 않을 거예요."     

그들의 벤치가 왜 바르샤바의 문화과학궁전 근처에 만들어졌는지 여전히 나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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