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아위스토크? 비알위스토크?
폴란드 단어는 정말 어렵다. 폴란드 역사를 펼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인명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비약이라고 하겠지만 정말 정말 어렵다. 예컨대 프랑스 왕가는 앙리, 루이, 샤를 등등 얼마나 간단한가 말이다. 거기에 1, 2, 3세를 붙이기만 하면 되니 외우는 것도 발음도 무척이나 쉽다. 그런데 폴란드 인명은 한눈에 보고 입에서 바로 나오지가 않는다. 그 옛날 퀴리부인의 이름을 외울 때도 아이들은 무척 어려워했다. 그 이름이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왔을 때 아주 기뻤었다. 아마 그 기억 때문에 퀴리부인이 더 기분좋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왕들의 이름 중에서도 '얀3세 소비에스키'나 '지기스문트2세 아우구스투스' 정도는 양호하다. 그런데 '카지미에슈 4세 야기엘론치크'라거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가 되면 그냥 덮고 싶어진다. 인명도 그렇지만 지명 역시 어렵다. 바르샤바에서 비아위스토크로 갈 때 우리 인솔자도 자꾸만 이름을 헤매는 게 느껴졌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인데다 어렵기까지 하니 누구든 쉽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비아위스토크로 가기 전부터 바르샤바 가이드나 인솔자나 자꾸만 이 도시에 대해 실망하지 말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비아위스토크는 그냥 경유지예요. 빌뉴스까지 거리가 워낙 길어서 중간에 쉬었다 가는 도시일 뿐이에요. 별 기대 하지 마세요.”
그냥 살짝 하는 얘기라 아니라 몇 번 반복해 듣다보니 조금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작은 도시라고 해도, 진짜 별 볼일 없는 곳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도 뭔가 의미를 찾아보려고 애쓰도록 해주는 게 맞지 않을까?'
심지어 이 도시는 포들라스키에(Podlaskie) 주의 주도로 폴란드에서 열 번째로 큰 곳이라고도 한다. 너무 과장하는 것 같긴 하지만 ‘폴란드의 베르사이유’라고 불리는 브라니츠키 궁전도 있다. 그 궁전 홈페이지에는 "아담이 잃은 낙원을 요한이 복원했다"는 18세기의 찬사도 있었다. 이 궁전을 지은 얀 클레멘스 브라니츠키의 '얀'이 곧 '요한'이다. 이런 찬사를 들을 만큼의 궁전에 지금은 비아위스토크 의대가 들어섰지만 그 정원에는 들어갈 수가 있다.
또한 비아위스토크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티코신이 있다. 야기에워 왕조의 마지막 왕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가 여기서 살다가 1572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폐허가 됐던 성이 지금은 복원돼 있는데 성에는 그녀, 바르바라 라지비우의 동상도 있다고 한다. 트로이의 헬레네에 비견될 만큼 아름다웠다는 바르바라와 왕의 사랑이야기는 무척 유명한 것 같다. 폴란드에서는 드라마와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첫 아내가 죽은 후 리투아니아 헤트만의 딸 바르바라와 결혼하려고 하자 온 왕실이 반대했다. 당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연합왕국이었는데 양쪽의 이해관계가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았다. 왕의 사랑이 너무나 강력해 바르바라는 온갖 방해와 장애에도 폴란드 여왕이 되었지만 어렵사리 결혼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의 주변에는 많은 여성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에게 바르바라는 '진정한 사랑'이었던 모양이다. 바르바라가 죽자 그는 환영에 시달릴 만큼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죽을 때까지 검은 옷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사랑 이야기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역사에 있었다.
사실 내게는 이 모든 요소들 말고도 또 다른 기대가 있었다. 이 상품을 선택하고 비아위스토크를 검색했을 때 조금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그는 빌뉴스 대학 교수이자 성녀 파우스티나의 영적 지도자였던 미하우 소포코였다. 빌뉴스에서 소임을 하던 파우스티나의 고해사제였던 그는 그녀를 정신과에 보내 상담을 받게 하기도 했다. 파우스티나의 환시가 정신병적인 증상이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걸 확신하게 된 그는 이후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국경이 달라지자 그는 비아위스토크로 떠나왔다. 이 도시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다 선종한 그가 '하느님의 자비 성당'에 묻혀 있다고 했다. 2008년에는 그의 시복식이 이 성당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비아위스토크에서도 자유시간이 있다고 하는데 그 성당을 다녀올 만큼의 여유가 있을까? 과연 이 도시에서 그의 자취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조금 설레는 중이었다.
호텔에 가방을 올려놓고 마트에 가려고 나왔을 때 나는 벌써 이 도시를 좋아하고 있었다. 쏟아지던 비와 포효하던 천둥과 번쩍이던 번개 이후 쌍무지개까지 드리워져서 기억의 완벽한 일부가 되어 주었다. 게다가 나는 처음으로 마로니에 꽃을 보았다. 조금 시들어가는 중에 비까지 쏟아져 후줄근한 모습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는데 그게 대수였겠는가. 그후로도 마로니에를 수없이 보았다. 에스토니아 탈린까지 마로니에는 피고 지고 있었다. 당연히 내 입에서는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듯....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라는 노래가 한없이 흘러나왔다. 이제 나도 이 노래를 좀 더 구체적인 그리움을 담아 부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