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새겨진 돌들이여
팔레르모 대성당 한편에는 한때 시칠리아의 주인이었던 이들이 잠들어 있다. 루지에로 2세(1130-54 재위)와 그의 딸 부부인 콘스탄차와 하인리히 6세, 그리고 손자 페데리코 2세다. 1140년 이래 유럽에서 가장 역동적인 국가였다고 전해지는 루지에로의 왕국은 노르만인, 동고트인, 사라센인 등이 섞여있는 다민족 국가였다.
그는 모든 민족을 편견 없이 중용하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으며 학문을 장려했다고 한다. 당시 시칠리아는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그리스 문화, 북유럽의 노르만 문화와 라틴문화가 뒤섞여 격조 높기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바로 페데리코(프리드리히의 이탈리아식 이름) 2세의 할아버지였다.
‘세계의 경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는 페데리코 2세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시오노 나나미는 그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비견될 ‘르네상스적 인물’로 평가하는데, 꽤 긍정적인 데다가 일말의 감상적인 느낌마저 있어서 난 심지어 눈물을 흘릴 뻔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로버트 카플란은 “…하인리히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박학다식과 코즈모폴리턴적인 궁정과 행정 개혁을 통해 노르만 왕들의 치적과 필적해 보려고 했다…”고 비교적 건조하게 언급했다. 반면에 《십자가 초승달 동맹》에서 이언 아몬드는 무척 신랄하게 그를 전해준다. 그는 프리드리히 2세라면 치를 떨었을 가톨릭교회가 결국 ‘패자’인 그에 대해 좋은 얘기를 남기지는 않았을 수 있다면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프리드리히의 마지막 혈통이 전투에서 죽고 그의 손자가 감금되자 교황 클레멘스 4세는 공개적으로 신께 감사”드렸다고도 전한다.
이렇다 보니 그가 진정한 자유인의 영혼으로 그 시대 온 땅과 온 하늘을 드리운 그리스도교의 천개 아래서 회의하고 저항하고 온전한 땅과 하늘을 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는지, 심각한 성격장애로 이해할 수 없는 폭력과 광기를 가진 뛰어난 군주였을 뿐인지 미처 판단하기도 어렵다. 앞으로 만나게 될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서는 또 다른 페데리코를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의 행보는 당시의 교황파(겔프당)에게는 영락없이 ‘적그리스도’였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지하던 황제파(기벨린당)에게는 거의 메시아급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단테가 《신곡》에서 그를 지옥에 처박고 많은 이들이 아주 사악한 괴물 취급한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겠다.
그의 무덤은 대성당 한켠 침묵 속에 놓여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뭔가 음악이 흐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음악은 성당에서 들리는 거였을까, 내 마음에서 울리고 있었던 걸까. 이제 와서 보니 잘 모르겠다.
죽음이 새겨진 돌들이여. 페데리코 2세와 그 가족들의 관을 보고 돌아서는 발길이 무거웠다. 그들을 기억하는 일의 어려움. 어쩌면 그들 역시 역사의 패배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금지된 이름일지도. 문득 가슴에 고목 한 그루 쿵 하고 무너졌다. 이름도 부르면 안 되는 사람들. 입술에 담아서도 안 되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도 그런 이름들일까. 대성당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의 협죽도 꽃그늘이 더욱 검붉게 드리워졌다.
팔레르모는 뒤안길의 도시, 팔레르모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남부가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나폴리를 폄하하는 메초 조르노의 악명이 팔레르모에서도 덧씌워져 있다. 물론 실제로도 팔레르모는 좀 음험하고 지저분하고 그렇기도 하다.
페데리코2세가 사랑한 도시 팔레르모. 그가 다시 돌아오고 싶었던 팔레르모. 팔레르모 사람들도 그를 사랑한다. 자신들의 도시를 사랑했고 지나치게 뛰어났던 그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동경의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찬란한 한때, 시칠리아 사람들의 ‘라떼는 말이오’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