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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3. 2023

섭리 혹은 변덕, 수국

유독 수국은 더 멀리 있는 느낌이다. 멀다는 게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어떤 세계가 그렇다는 거다. 달리 말하면, ‘측량하기 힘든’ 어떤 거리를 느낀다는 거다. 

그 전에도 수국을 봤을 텐데, 내게 수국이 아로새겨진 건 그 수녀원으로 가는 길목에 피던 그해 여름 우기의 수국이다. 매일, 미사를, 새벽미사를 갔었다. 비가 매일 내렸다. 긴 우기였다. 

매일 내리는 비에 수국 꽃알갱이들이 톡톡 이른 시간의 적요를 건드렸다. 잠깐이라도 우릴 보고 가렴. 아직 보랏빛 알갱이들이 갓 잠에서 깬 눈빛으로 말갛게 나를 바라보곤 했다. 아주 잠깐,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스치던 여름. 


수국, 서울숲(2021. 6. 17.)


생의 갈림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수녀원에 갈까? 마음이 고양되던 날이었다. 아마도, 어쩌면, 그래서 나는 수국의 꽃말이 ‘변덕’이라는 말에 좀 어이가 없었다. 그 여름, 그 새벽의 수국을 바라보며, 내 안에 물든 건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같은 것,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의 아름다움이었는데, 변덕이라니!


유독 파랗고 유독 서늘했던 긴 빗속의 수국. 다시는 그런 빛의 수국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꽃을 보는 내 시선이 달라졌을지도. 두고 온 마음에 대한 그리움이나 미련, 아쉬움이나 죄스러움을 담아놓은 수국이라는 이름. 내게도 두고 온 마음, 가지 못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마음이 수국에 배어있는 것일까? 수국, 이라는 이름을 발화할 때마다 언뜻 스치는 무엇이 있다. 



수국은 토양의 성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산성일수록 파란색을 띤다. 처음엔 흰색으로 핀 꽃에 시나브로 청색이 번지고 조금씩 붉은색도 더해지며 보라색이 되어간다. 수국은 완전히 만개하기까지 줄곧 물든다. 이 꽃은 시시각각 화(化)한다. 눈으로 보이는 그 여정이 자꾸 말을 거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제 오늘, 내일. 어제의 네가 아닌 꽃, 오늘의 네가 아닐 내일의 너. 


  


나 역시, 그리고 그대들도 어제의 우리는 아니다. 정말 바람직한 의미로, 우리는 어제의 나가 아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조금이라도 가볍게, 조금이라도 아픔을 다독이는 오늘의 나여야 한다. 그러기를 바라게 하는 꽃이다, 수국은.    

“나, 오늘도 이만큼 물들었어. 이만큼 피어났어. 넌 어때? 괜찮아. 그런 날도 있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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