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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5. 2023

나도 꽃, 나도수정초

이 드문 생명체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꽃'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조금 비워야 한다. 그리고 조금은 음습한, 조금은 신비가 배어 있는 숲으로 찾아가야 한다. 일반적인 꽃답지 않아 당황스러운 이 꽃은 숲속에서 자라는 부생식물로 여러해살이풀이다. 부생식물이란 ‘생물의 사체(死體)나 배설물 및 분해물 따위에 기생하여 양분을 얻어 사는 식물’을 가리키는데, 나도수정초는 잎이나 꽃, 줄기 전체에 엽록소가 없어서 스스로 광합성 작용을 하지 못한다. 광합성을 못하므로 굳이 햇빛도 필요하지 않은 이 꽃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도수정초는 분명히 꽃이다. 그러나 이 꽃을 보는 순간 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 도리어 가장 먼저 일어나는 감정은 기괴한 생명체를 만난 듯한 당혹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계에서 온 생명체를 보듯 이 꽃을 만난다. 그만큼 낯선 형태를 가진 이 꽃은 꽃 전체가 수정처럼 순백색이다. 기둥과 잎, 꽃잎까지 모두 투명하게 보이는 흰색이다. 


나도수정초, 선운사(2017. 5. 19.)


처음 이 생명체를 만났을 때 좀 웃음이 났다. 너무나 독특한 생김 때문에 이런 꽃도 다 있구나 싶은 웃음이 푸슬푸슬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니 정말 꽃은 꽃이었다. 하얀 기둥으로부터 돋아난 얇은 잎들과 그 잎들 위로 둥글게 매달린 종모양의 꽃, 그리고 꽃 속에 박혀있는 푸른 눈동자 같은 암술까지 볼수록 신비로운 꽃이었다. 


나도수정초, 청옥산(2021. 6. 19.)


나도수정초, 선운사(2016. 5. 20.)


그런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미지였다. 한참 만에 기억해낸 그것은 조지아 민속무용 Narnari를 추는 여성의 의상이었다. 하얀 붕대로 꽁꽁 싸맨 듯한 머리장식과 온통 하얀 긴 소매의 긴 드레스. 이 꽃은 조지아 왕녀처럼 기묘하고 꼿꼿했다. 왕녀의 처절한 고독 같기도 했다. 조지아의 왕녀는 웃음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춤을 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순백의 옷감이 모든 감정까지 표백해버린 듯 싶었다. 그러니까 그의 의상은 상처를 감추는 붕대 같기도 했다. 피 철철 흐르는 밤, 그 기억까지도 투철하게 봉쇄하는 듯한 의상 속 왕녀가 인적 없는 숲속에 도래해 있었다.


또 하나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었다. 아마도 많은 이가 공감하게 되는 백마,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로부터 질주해오는 백마의 내달림이 거기 있었다. 영낙없이 월터 크레인의 ‘포세이돈의 말’이었다. 숲속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백마의 무리.     


사진으로만 보면 나도수정초는 여전히 기괴할 것이다. 실제로 보는 건 참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신기한 반응이었다가 감탄하게 되고 이내 매혹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도수정초에 빠져들어 더 가까이에 두고자 있던 자리에서 캐내 오는 것은 명백하게 어리석은 일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나도수정초는 바로 그곳에서 그 토양속의 영양분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만 살아가는 나도수정초. 

있는 그대로, 있는 곳에, 존재하는 대로 존중해야 하는 삶의 이치. 원래의 자리가 아닌 데로 옮기려 하고, 원래의 그가 아닌 그로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참 독특한 꽃 나도수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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