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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Aug 12. 2021

독서클럽과 자기소개

백수라면 어떻게 소개를 할 것인가?

우연히 온라인 플랫폼에서 강연 검색을 하다 독서모임을 알게 되었다.

이달의 주제로 택한 책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노자의 도덕경, 칸트의 순수철학비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등 

정말 동서양의 고전 필독서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모임의 수준을 유추할 수 있었다.

독서 토론의 유료멤버십 클럽, 트레바리 등에도 예전부터 관심을 기울였지만 왠지 진입장벽이 높게만 느껴졌었다.

젊은이들의 소셜클럽과 별반 다를게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또한 한가지 사실은 내가 당당히 나 자신을 소개하고 그들과 동화할 수 있을까하는 자격지심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제나 모르는 사람들과의 처음 미팅에서 어떻게 자신을 소개해야하는지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냥 어느 회사에 다니는 아무개 입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건 진정한 자기소개가 아닌 회사소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제는 회사의 명함이 없어도 자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나 문장 쯤은 만들어 내어야할 나이가 아닐까.

용기를 내어 미리 구상한 것을 적어 보았다.

 

자기소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 난감해지곤 합니다.

사회에서 인정되는 교수 같은 지위라든가 회사의 직함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런게 과연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맞는 대답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밖에서 보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의 질문이 아닐까요?  

내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역시 저는 책과 글을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고 또 그것을 나만의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어쩌면 저의 생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책 속의 문장에서 길러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을 만나서 다양한 개인의 독서 취향을 엿보고 또 나눠보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이자리에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쯤 되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의 준비를 해보았다.

그리고 초행길인 신촌서재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만의 서재는 없어도 누군가 이용할 수 있게 공유된 서재는 정말 멋진 공간이다.

입구에서 부터 표식이 남다르다.

오픈시간은 지식이 깨어날때 마감시간은 지식이 문닫을때

그러고 보니 지식이 라는 말이 꼭 사람 이름 같아 보여 웃음을 자아낸다.

 

서너명이 모이는 자리라 큰 책상 하나가 전부였고 공간을 가득 채우는 책들이 모두 내가 보고싶었거나  한 번 쯤 펼쳐들어봤던 책들이라 반가웠다.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라는 신간 아닌 재출간 신간이 있었고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도 많이 보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유의 순수한 표정이 있다. 모두가 말똥말똥한 총기어린 눈빛을 보내온다.

드디어 운명의 자기 소개 시간이 되었다.

처음 자리한 나는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침착하게 준비했던 말들을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일 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이 진심으로 박수쳐주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내 스스로가 해냈다는 대견함 마저 들었다.

" 어머, 작가님 같으세요, 어쩜 그리 말씀을 잘하세요"

 

나는 내 자신이 말을 잘못한다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컴플렉스에 시달렸었다.

사람들이 어울려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을 얘기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스스로 움츠려들기도 하였다.

소개팅을 나가도 할 말이 없고 어떤 대화의 소재가 나와도 나는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한탄하기도 여러 해, 더이상 스스로를 방관할 수 없어 나는 신문을 보고, 칼럼을 읽고, 전문서를 보고 그렇게 지식을 쌓아나갔다.

어떤 주제가 나와도 내 자신의 지식과 견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미리 스크립트를 짜듯이 할 말을 글로 사전에 정리해 보았다.

그렇게 하나 둘 씩 경험이 쌓이고 보니 내 머리 속에서는 문장들이 자유롭게 춤을 추게 되었다.

누가 대뜸 생뚱맞은 질문을 해도 나는 당황하지 않고 조리있게 말을 하며 그러다보니 칭찬도 여러차례 듣고 더욱 신이나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말못하고 수줍고 내성적인 내 모습을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앞에 앉은 회원이 책의 이 부분이 무슨 뜻이냐고 옆사람에게 물어본다.

출판기획사 대표라는 지긋한 나이의 그 분은 " 제가 그걸 알면 여기에 있겠습니까? " 하고 답하며 겸연쩍게 웃는다.

다시 그 회원은 나에게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묻는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 명천지지시.  유, 명만물지모

 

도가 도를 말하면 도가 아니고 이름이 이름지어지면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이며 유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다소 선문답 같은 노자의 도덕경은 철학적인 질문을 하고 있기에 그 이치를 스스로 우쳐야 한다.

사실 나는 책을 읽어오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봤던 주제라 내 의견을 소신있게 답하였다.

 

우리가 도라고 할때의 그 개념은 도가 아닌 것이며 그저 언어에 지나지 않고 

이름을 부르게 되면 이름이라는 한계가 생기므로 그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유가 무에서 나고 유가 다시 무가 되듯이 모든 것은 연결된 것으로 봐야지

하나 하나의 구분으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노자의 사상은 대부분이 역설적인 발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교의 사상과도 일치하는 면이 발견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물질계를 대표하는 색은 실체가 없는 공의 개념이며

실체가 없는 공은 다시 물질이 되어 색을 드러낸다.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평등한 불이 사상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있음과 없음을 따지고 구분하는데 이런한 것은 일 부분만을 보는 것이고 전체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구분하는 것은 차별적 관점을 지니게 되어 불평등한 방향의 시각이 생긴다.

나와 너를 경계짓기에 타인을 이해하기 어렵고 이기심이 생기며

정당을 구분하고 파벌을 만든다면  폭력과 선동이 난무해 진다.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것, 개념화 하는 것에는 사실 함정이 있다.

도 라는 개념은 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지 도 자체를 표현할 수 없다.

 

노자나 불교의 이와 같은 사상은 양자역학의 과학적 사실과도 일치한다.

양자역학의 유명한 비유,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다. 

실험자가 관찰하기 전에 상자 안의 고양이는 50대 50의 확률로 사망과 실존에 걸쳐있는 양자 중첩의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해 죽은 것도 아니오 살아있는 것도 아니게 된다.

 

우리가 보는 현상계의 모든 것은 빛으로 지각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빛은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통과하여 반사된 빛이 망막에 이미지로 맺히는 것일 뿐이다.

결국 주관자의 감각과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알 수 있다.

 

자기 소개를 하는데 어떤 여성분이 자신은 습자지와 같아 지식이 짧고 얇다고 여러 번 강조하여 말을 한다.

나는 어떻게 저렇게 자신을 비하하며 그것도 몇 번씩이나 말해서 사람들에게 잘못된 개념을 각인하려는 것일까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저 분은 공자가 말하는 예를 지키려는 것인가, 자신을 낮춤으로써 타인을 공경하는 예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여자가 많이 알면 안되고 나서서도 안된다는 다소 차별적인 인식에서 나온 것은 또 아닌지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결국 남자들의 백치미 사랑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인지 여자가 치맛바람을 일으키면 안된다는 유교적 사상이 아직도 우리사회에 지배적인 관념인지 알 수 없었다.

 

나 또한 다른 의미에서 반성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지만 스스로를 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보인다.

나는 솔직히 어디서든 주목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다. 남들과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다.

그러한 생각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부정인식에서 지나친 긍정의 갑옷을 두툼하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긍정의 긍정은 부정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노자의 무위 사상이 바로 그런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닐까.

 

위사상은 위함이 없다는 것이다.

아닌 것을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위함이다.

어찌보면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 그에 반대되는 것은 모든 인위와 작위가 만들어내는 거짓이다.

 

나의 새로운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일기를 쓰면서 반성하게 된다.

되려고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낱 열정에 가려진 욕심일 뿐이다.

화가가 되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되기 위해서 책을 쓰는 사람은 없다.

나는 글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이지 그것이 무엇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릴 때 본말이 전도된다.

 

작가 김영하는 '말하다'라는 인터뷰 형식의 글모음에서

스스로는 '절대 출판하지 말 것' 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글을 쓴 것들이 많다고 고백한다.

글은 자유롭게 내 안에서 풀어나가는 것이지 

출판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한 문장도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고 설명한다.

 

운동을 잘하는 방법은 힘을 빼는 것이다.

잘하려는 마음이 온몸에 긴장과 경직으로 이어져 굳은 근육을 만들고 

자유로운 기량을 펼칠 수 없게 한다.

 

그저 글을 쓰면 된다. 

작가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책을 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함이다.

글을 잘써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위함이다.

위함이 아닌 것, 본연이 그러한 것.

그것이 장자가 말하는 무위 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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