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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Aug 30. 2021

전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로마의 테르미니 기차역만큼이나 복잡한 서울의 용산역에서 전주로 가는 KTX의 플랫폼 번호를 전광판으로 확인한다.

이탈리아의 기차는 때로 24시간 지연이라는 무지막지한 연착을 안내하기도 하는데 한국의 기차는 1분도 늦지 않게 정확한 코리안타임을 선사한다.

철로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기차의 날렵한 앞모습이 지나가고 긴 꼬리를 이은 뒤태를 보여준다.

한국의 승객들은 마스크를 철저히 끼고 자신의 객실칸을 찾아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이제 옆자리 앉기가 가능해진 객실은 휴일을 맞은 커플들로 붐비었다.

시속 300킬로미터가 무색하게 좌석에서는 일체의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로지 차창 밖 기차 뒤로 휙휙 재빠르게 멀어지는 풍경만이 속도를 체감하게 해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시간은 변화하는 것을 측정하는 도구' 라고 하였다.

우리의 보편적 상식과는 어긋나는 듯 보이지만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때 봄날이 왔다고 느끼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고 단순한 정의이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갈 때 또는 정지한 것처럼 느껴질 때는 시간이 멈추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인슈타인은 시계공업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베른에서 특허청 업무로 기차의 시간을 통일하는 연구를 하다 결국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다. 시간은 상대적인 속도에 따라 달라지며 광속에 가깝게 달리는 기차안에서는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간다는 것이다.

대 문명사회는 우주의 시적 신비와 은하계의 비밀을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개인의 자유를 사회 질서라는 그럴싸한 명분에 따라 통제하듯이 시간도 사회적인 구속에 따라 획일화된 표준시라는 것이 태어난다.

원래는 지구의 모든 시간을 시차없이 단일한 규정으로 만들려하였으나 정오 12시가 태양이 가장 높은 낮이 되어야한다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절충점을 찾게 되는데 결국 지구를 사과를 짜르듯 경도로 조각내어 시간대를 조정하였다. 그것도 정확한 직선이 아니라 나라에 따라 해안에 따라 여러가지 지형을 고려하여

삐뚤빼뚤한 선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실인양 느끼며 살아가게 되었다.

 

기차안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영하가 육성으로 오디오북을 녹음한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는 책을 읽고 있다.

까를로 로벨리의 책은 두번째인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라는 다소 시적인 제목의 양자역학 책을 어렵게 완독했었다.

전공불문인 나에게 이러한 과학책이 쉬울리는 없으나 그만큼 어려운 것을 정복하는 것에 대한 묘한 성취감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세상에 대한 모든 개념을 뒤집는 양자역학을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모두가 yes라고 하는 것에 나는 언제나 흥미를 잃고 오답일지라도 나만의 no를 외친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소크라테스는 일찌기 지식에 일침을 가한다.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라고.

 

전주 한옥마을은 두번째 방문이다.

지난 겨울 무채색의 풍경과는 다른 채도 높은 풍경이 펼쳐진다.

대지의 푸릇푸릇한 생명력과 함께 나무는 연녹색의 빛깔 고운 옷으로 손을 흔들 듯 가지를 흔들어 반갑게 맞아준다.

전주는 이탈리아로부터 slow city 공식인증을 받은 도시로 느린 속도의 시간을 체감할 수 있는 장소이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가속운동을 하는 테헤란로와 강남대로를 오가는 속도감은  피로를 일으키고 호흡을 고를 수 있는 고즈넉한 숨결의 한옥마을을 찾게 한다.

지난번 공공시설 폐쇄로 아쉽게 놓쳤던 경기전에 표를 끊고 입장한다.

조선시대인지 개화기인지 알수 없는 정체불명의 개량 한복을 입은 커플들이 경내를 누비며 코스프레를 하는 중이다.

수령이 삼백년이 넘는 커다란 나무가 곳곳에 우뚝 서있다.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 긴세월을 침묵으로 버티며 역사를 그대로 지나왔을 나무가 깊은 감동을 준다.

한없이 초라한 인간의 굽은 어깨와 대조되는 우직한 나무의 뿌리는 나무의 자존감을 지켜주며 하늘로 쭉뻗은 곧은 척추의 당당함을 자아낸다.

조용히 귀를 귀울이면 바람결에 스치는 나무잎들의 재잘거리는 음성이 들릴 듯 하다.


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거세어 지더니 변덕스런 하늘은 이내 잿빛의 먹구름을 몰고오고 예보대로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찾은 카페, 차와 함께 풍경을 감상하는 '차경'은 트렌드를 좇는 젊은 처자들로 가득하여 이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

조선시대 향교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던 양사재는 오늘 묵을 한옥집이다.

역사 속의 현장을 민박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임을 실감하며 밖에서부터 카메라를 연신 들이댄다.


수백년이 지난 삐걱거리는 대문이 초인종을 대신하였고 아기자기한 조경의 정원이 중정을 대신하였고 ㄱ자 형식의 방들과 툇마루가

정겹게 우리를 맞이하였다.

할머니댁에 놀러온듯한 구들장 장판과 전자기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순한 빈방에 김홍도 느낌의 풍속화가 걸려있고  한켠에는 이불보료가 여져있다.

한 숨 돌릴 겸 지친 몸을 쉬고자 눕는다.


나른하고도 한없이 게을러지는 씨에스타와 같은 달콤한 오후의 휴식을 즐긴다.

5시가 지나자 어김없이 생체시계는 저녁 먹거리를 달라고 경고를 울리기 시작한다.

지난 번 골목에서 발견한 전혀 전주스럽지 않은 모던한 아메리카 감성의 펍, 노매딕 브루어리를 찾는다.

샌프란시스코의 히피일 듯한 주인장의 옛 사진이 걸려있고 카운터에는 맥주를 따르는 탭들이 일렬로 정열되어 있다.

노마드는 현대인들이 꿈꾸는 낭만적 자유의 상징이다.

실제 유목민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우리는 알 바 없으니 한 곳에서 다른 곳을 이주하며 사는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꿈꾼다.

올해 오스카 어워드에서 노매드랜드가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실제 차에서 생활하는 그저 노숙자보다 한단계 나을 뿐인 그들의 삶을 리얼리티에 가깝게 연출하여 감동을 주었다.

더이상 가족과 함께할 수 없는 이들, 집이 없기에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는 이들, 노마드들은 각자의 상처와 이유가 있다.

 

주문을 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카스와 테라 등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한국의 호프집들과 달리 이곳의 수제맥주 종류가 제법 다양하다.

이름에 들어가 있는 의미를 중요시하는 나는 encription을 선택한다.

어쩌면 이세상은 암호로 가득하고 우리는 그것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킹하는 해커일지도 모른다.

쌉쌀한 홉이 강하게 퍼지는 IPA 는 내 개인취향에 잘 맞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먹어볼 듯한 길다란 소시지에는 고기향이 가득 베어있었고 치즈플레이트와 초리초 등 유럽적인 안주거리를 먹었다.

얼큰하게 취하여 부른 배와 엉거주춤한 발걸음을 휘청거리며 한옥마을의 밤거리를 가로지른다.

 

 양사재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고 새벽녘 4시의 집닭의 높은 소프라노는 면봉으로 귓속을 파듯 꼭꼭 찌른다.

더 잠들기는 글렀고 뜬 눈으로 조금 더 시간을 보내자 이번에는 맑고 영롱한 음색의 샛소리가 뒷산에서 삼중창으로 울려퍼진다.

쇳소리만 듣고 사는 산업 도시인에게 이러한 아침이 주는 모닝 음악은 힐링이 따로 없다.

여행지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직무유기. 서둘러 샤워를 하고 뒷산 오목대로 향한다.

나무데크로 이어진 숲길같은 등산로를 몇걸음 옮기다 보니 광장같은 너른 곳에 큰 정자가 있다.

둘레길같은 산에 이런 곳이 있으니 여유롭기 그지 없다.

공부에 지친 유생들이 가끔씩 올라오며 심신의 안정을 취했으리라 상상해본다.

 

10시 기차를 예약했기에 아침밥을 먹으러 현대옥 전주점으로 향했다.

맑은 콩나물 국밥에는 고추씨가 있어 얼큰하면서도 개운한 느낌을 준다.

콩나물의 아스코르빈산으로 숙취를 해소하고 위장을 달래준다.

아쉬움이 남은지라 마지막 이십여분을 다시 골목을 누비며 한 곳이라도 더 담고 보려고 노력한다.

교동살래의 예쁜 장미 꽃이 오늘의 하이라이트 사진이 되었다.

전주, 그래 2번이 딱 좋은 그런 곳이다.

처음은 놓친 게 많아서 두번은 속속들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첫만남보다 중요한 게 두번째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첫인상은 속기 쉽고 두번째에는 좀더 진실한 내면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KTX의 정확한 시간덕택으로  열두시반에 용산을 거쳐 연남동에 도착하게 된다.

지난번 스쳐지나갔던 독립서점 '리스본 포르투'로 목적지를 정하였다.

사실 포르투갈  리스본, 포르투는 바로 작년 3월 코로나를 뚫고 유럽으로 날라갔던 마지막 여행지가 되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곳이다.

그곳에서의 추억으로 어쩌면 일년을 버텼을지도 모른다.

책주인도 그런 감상어린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평행우주 같은 세계를 느끼며 서점 오픈시간이 되자마자 들어갔다.

역시 안목있는 세심한 정성으로 도서가 큐레이션 되어있었고 나무 목공예의 작품들이 손맛을 느끼게 해주며 공간에 특색을 부여하고 있었다.

4층의 건물전체를 과연 서점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 하는 나의 우려가 무색하게 이곳의 찐팬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 운영보다는 매달 한권의 책과 원두커피가 곁들여져 오는 정기구독 서비스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들을 실컷보고 오래도록 머물수 있는 이런 아지트를 만든 사람은 분명 작가일 것이다.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아담하게 꾸며진 공간에 손맛이 나는 원목 그대로의 테이블이 놓여있다.


오늘 서점에서 발견한 행운같은 시집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 시간의 컬러에 대한 꿈" 이다.

정말 제목이나 작가를 보지도 않고 핑크 컬러에 이끌려 고른 책이 이렇게나 나의 취향에 맞는다는 것이 기적같기도 하고 큰 인연으로 느껴진다.

시간, 컬러, 그리고 꿈. 내가 좋아하는 것듵...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집의 목차 또한 지극히 프랑스 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다.

튈르리 공원, 베르사이유..

삶 자체가 여행이니 모든 순간에서 나는 여행의 요소를 발견하고 있다.

여행자의 눈은 작가의 눈을 닮아있다.

나는 어디서나 호기심어린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낚아 시어로 만든다.

나의 인생이 한편의 서정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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