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전화가 걸려온다

by 리나


나른한 오후의 햇살에 방심하고 있는 찰나, 졸음을 깨우는 뜬금없는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번호가 뜬다. 누군가에게 사적인 전화를 받는 거는 몇 년만의 일인 것만 같다.

요즘은 사람들이 개톡을 하다보니 전화를 하고 거는 것이 더 이상해졌다.

사실, 나는 문자가 더 어렵다. 문자는 의도를 알 수 있는 표정같은 문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 끝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없다.

" 오늘도 고생했어 " 하면 " 응~ 고마워^^ " 를 할 것이고 나는 또 " 잘자~ "를 할 것이고

그럼 또 저쪽이서 "굿나잇~" 을 할 것이고 그럼 또 무슨 말을 더해야 하나 끊어야하나 고민하다 이모티콘을 보내는 것으로 적당히 넘기는 것으로 얼버무린다.

도저히 끝날 때와 이어갈 때를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이면 짧게 문자를 끝내려하고 감정을 이어가지 않는다.

뫼비우스의 띠같은 도돌이표가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건지 나만 이상하게 구는 건지는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내가 특별히 예민한 것 같기는 하다. 문장과 단어가 주는 의미와 감정에 많은 생각을 하다보니 왠만하면

단서를 남기지않는 단답형으로 건조하게 답변한다.


옛날에는 심지어 이런 말도 있었다. " 용건만 간단히 "

나는 문자를 약속의 용도로만 사용한다. " 언제 볼까? " 같은 시간을 맞추는 용도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단한 인사나 안부로 상대방의 의중을 따보고 주의를 먼저 환기시킨다.

" 잘 지내? " 이런 말조차 나는 어색하다.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 못지내~"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나?

" How are you ? " 라고 물으면 곧 죽어도 " Fine, Thank you. " 를 외치는 것처럼 수학 공식같은 그런 형식적인 질문은 오히려 불편하다. 그냥 용건으로 바로 넘어갔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뜬금없이 전화는 왔는데 받을 때는 또 뭐라고 받아야 하는지 참 고민된다.

분명, 발신인이 떴는데 " 누구세요? "를 할 수도 없고 " 여보세요? " 는 이미 사라진 고어가 되지 않았는가.

건조하게 " 어~ " 라는 말이 나오고 " 어디야? " 라고 묻는다. " 왜? " 라고 묻지 않은 게 다행이다.

참 내가 생각해도 멋대가리가 없다.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더라? 연인사이라면 " 자기야~ " 라고 할거고 친구사이라도 다정하게

" 응. 상욱아~’ 라고 다들 정감 있게 말하던데. 나는 그런 애교도 기술도 장착하지 못한 나무토막 인가?


처음 그를 단둘이 만났을 때 그는 이야기 도중 '자기'라는 호칭을 무의식적으로 꺼냈다.

실수했음을 인지했는지 자기가 그 말을 회사 사람들에게도 쓴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충분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어쨌거나 어색함을 만회하고자 나도 모르게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웃음은 긴장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베르나르의 책에서 말했다. 뇌의 부조화 인지 체계가 만들어낸 표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허허~ 하고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탄식을 한다.


어색함은 처음의 인사가 그럴 뿐이지 대화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가 한 번 터지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좀처럼 상대에게 말할 틈을 건네주지 않는다.

그런 속사포같은 이야기를 상욱이는 잘도 들어준다. 듣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형태가 아니다.

적극적인 참여가 없으면 듣기는 가능하지 않다.

쉴 새없이 뻗어가는 대화의 가지들을 따라가려면 적극적인 집중과 자기 통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쉽게 짤라 먹곤 한다. 도대체 나의 생각들을 멈출 수가 없고 기어코 내가 이야기를 주도하려면 상대방의 말을 중단하는 수밖에 없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을 어제 그에게 추천했다. 영화를 다운로드하는 방법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50대의 여전히 멋있는 다이언 레인은 나의 워너비이다.

중년은 여자로서의 성적 정체성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항상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바쁘게 올해를 오늘 이순간을 살았다.

더이상 내게 여자로서 어필할 시간은 얼마 남지않은 듯했고 그것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급하게 만들었다.


유튜브를 열심히 한 것도 마지막 남은 잎새를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나의 영정사진 같은 마지막 청춘의 기록들을 기억하고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 해가 다르게 달라지는 얼굴과 신체는 더이상 숨길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고 해도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멀어진 지는 한참 되었다.

영화 속 보여지는 다이언 레인은 중년임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며 소녀적인 순수함도 엿보였다.

사진을 좋아하고 와인을 좋아하고 빨간색 드레스를 멋지게 소화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 자신을 대입해보기도 하였다.


' 파리로 가는 길 ' 은 프랑스 남자의 재치 있는 행동과 유머가 돋보이는 로맨틱 아트 영화이다.

파리가 아닌 프로방스의 라벤다 평원을 보여주고 2천년전의 수도교를 보여주고 유럽의 성당을 보여준다.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 (dejeuner sur l’herbes)’를 연출한 피크닉 장면은 영화의 예술적 백미이다.

이토록 로맨틱할 수 있을까. 깅엄체크의 패브릭과 와 유럽풍의 피크닉 바스켓은 훌륭했고,

접시와 커트러리까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꽤나 마음에 든다. 그녀에게 꽃다발과 손편지와 초콜릿을 선물하는 그런 멋진 남자,

내가 항상 꿈꾸었던 로맨스이다.


아주 예전의 남친에게 내가 한가지 딱 바랬던 것이 있었다.

편지 한 장 써달라고 그런데 그 부탁을 그는 안들어주고 그냥 떠나버렸다.

한 달 밖에 같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시작한 만남이었는데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나는 그때 심지어 캘린더를 손수 제작했었다. 1년 365일을 수기로 그려서 만드는 다이어리였다.

숫자 하나가 틀리면 안되기 때문에 극도의 세심한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수제 캘린더, 나를 1년 365일 생각하라는 그 의미를 그는 져버렸다.

머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한 사람이지만 그 이후로는 남자는 잘해줘야 소용없다는 오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기억도 못할 텐데 뭐하러…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누군가를 생각해야하는 시간이다.

정말이지 남녀관계란 소모성의 감정 노동이 되어버린다.

나는 꼭 만남의 시간 만큼의 복기를 한다. 이럴 때는 이렇게 했어야 했고 이런 말을 했었는데 잘 표현하지 못했고... 그런 기억들이 나를 가만 놔두지 못한다.

내가 내 말만 하느라 듣지 못했던 상대방의 의도를 뒷북치며 생각해 보기도 한다.


상욱이는 처음에 여수에 대해 물어볼게 있다고 했다. 근데 나는 그 질문을 채 들어보기도 전에 호텔 예약은 꼭 미리하고 어디가 좋다는 말만 했다.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언젠가 그는 신사동에 맛집을 소개해달라고도 했었는데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 같이 저녁먹을 수 있느냐" 는 것이었을까...그때는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고, 즉흥적으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가깝고 좋으니 여기로 오라고 했었다. 그리고 같이 식사를 하고 루프탑을 가고 이태원 거리를 걸었다.


내가 살짝 심쿵했던 순간은 그가 화장실에 가는 나를 위해 비밀번호를 눌러주고 기다려줬던 일이다.

사람은 이런 사소한 디테일에 감정이 동하는 법이다.

나는 그에게 과연 그런 순간이 있었을까.

내가 그 일을 얘기했을 때 그는 내가 손을 잡았을 때의 떨림이라고 말을 해줬다.

지금도 그와 손을 잡는 것은 따뜻하고 설레는 일이다. 감각은 언어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예술, 이탈리아, 책, 영화 등 내가 좋아하는 주제들을 마음껏 그와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좋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느낀 것은 역시 배려심과 인성이다. 몸에 베인 습관은 자연적으로 나온다. 늘 남들을 먼저 배려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다. 그렇다고 오버해서 리액션을 하지는 않는다. 담백하게 표현하고 감정도 절제한다.


그런 그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적극적인 구애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음, 아마도 ‘길들이기’가 아닐까. 그것은 서서히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잉크가 물에 떨어지듯이 서서히 색감이 퍼지는 것이다. 한 번 물이 들면 색은 물과 분리하기 어렵다. 습관의 힘은 그래서 강하다.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것은 하나뿐인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장미를 가지는 길, 모든 것은 상대적이지만 이름을 붙인 나만의 장미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절대성이다.


‘전화를 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상대방이 전화를 기다리게끔 만드는 것이다.

관계를 만드는 것은 기다림을 만드는 것이다.

만남과 만남의 공백에 기다림을 채우는 것이다.


나는 기다림이 얼마나 힘든 고통인지 잘 알고 있다.

만남과 만남의 사이는 셀렘이 되지만 만남과 이별의 사이는 불안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