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탈리아 성애자

by 리나

어느 날 나는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예매를 하였다.

영화가 아닌 이탈리아 바티칸의 영상과 해설이었다. 그녀도 나도 좋아하는 이탈리아, 로마 이야기를 공식가이드의 설명을 통해 관람하는 특별한 형식의 시네마 초대회였다.


Covid 19의 2020년에는 국경이 봉쇄되고 여행이 금지되었다. 투어 가이드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한국인 관광객을 만날 수가 없게 되자 온라인 컨텐츠 비지니스로 옮겨갔다.

사람들도 여행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리움을 랜선여행으로 달래는 중이었다.

단, 몇 분만에 예약이 끝나버리는 이번 행사를 어렵게 예약하고 그녀에게 기쁜 마음으로 알려주었다.


별 거 아닌 영화데이트도 그녀가 함께하면 특별한 것이 된다.

이탈리아 향수병에 젖어있는 그녀에게 이번 데이트 기획은 유효 적절한 것이었다.

그녀가 이탈리아 성애자라면 나 또한 ‘로마인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을 정도로 로마 중독자이다.

평소 로마의 역사와 유럽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나이지만 누구와도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알쓸신잡형의 박학다식함에 예술에 대한 식견도 깊이가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끊임없는 지식의 향연이며 나의 오랜 갈증을 해결해주는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녀의 자리는

나의 옆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극장에서는 띄어앉기 좌석으로 배치한 것이다. 극장에서는 모름지기 연인이 나란히 앉아 숨결을 느끼며 손을 마주잡는 것인데 적잖이 섭섭한 거리두기 였다.


그러나. 예상은 기대를 빗나갈 때 더욱 짜릿한 법이다.

그녀는 무심코 횡단보도를 건너다 나의 손을 돌연히 잡는다. 남녀는 자고로 chemistry로 통하는 법이다.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양전하와 음전하가 이끌리는 강력한 자성처럼 둘의 손은 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둘은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더 키친’으로 향하였다. 그녀는 모르는 곳이 없다.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트렌디한 장소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 분위기를 캐치할 줄 아는 센스가 차고 넘쳤다

역시 유튜버다운 감각이다.

‘더 키친’은 정통 이탈리아 피제리아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주문을 부탁한다.

체리토마토와 치즈만으로 만든 'DOC'피자와 '에그플란트 그라탕'을 주문한다.

그녀는 한번도 자신의 결정을 유보하는 적이 없다. 정확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의사표현한다.

나는 그런 그녀의 확신에 이끌린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는 법이 좀처럼 없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지만 어떤 때는 그런 망설임이 후회가 되기도 한다.

지난 번에 이어 또 한 번의 반차를 내었다.

그녀는 낮에 일정이 있다며 극구 말렸지만 나는 단 십 분이라도 그녀를 일찍 보는 편을 선택한다.


그녀는 나의 시간에 충분히 보답하는 열정을 보여준다.

역시 내 예상과 바램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위해 일정을 바꾼 것인지 저절로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후 두시로 약속을 정했다.

지난 만남에서 익히 경험한 바이지만 그녀는 본인이 늦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자들은 흔히 꾸미느라 자신이 늦는 것은 당연한 애교이고 남자가 늦는 것은 이유불문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먼저 약속장소에 와서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이 준비할 것을 챙기는 그런 사람이다.

지난번 익선동에서 만났을 때도 그녀는 한시간도 더 일찍 와서 대기표에 이름을 걸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내가 늦는다고 투정부리지는 않는다.

양재천에서 볼 때도 와인 피크닉 가방과 함께 나를 기다렸다.

오늘은 내가 먼저 도착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이미 그녀는 약속장소로 가고 있었다.

그녀의 계획은 나보다 먼저 근처에 도착해서 와인을 사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방심하지 말고 내가 먼저 가야지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다행히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정신없이 와인 코너를 향해 직선으로 들어오면서 눈으로는 와인의 라벨을 스캔하듯이 빠르게 훑는다.

와인 전문가를 빰 칠 정도로 그녀는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와인을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알지 못할 이름을 자신있게 외친다.

그녀는 오늘 사고 싶은 와인이 딱 하나가 있었다. 항상 그렇듯 그녀는 계획이 다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와인은 없었다. 그녀는 와인의 이름 뿐 아니라 수입사까지 꾀차고 있다.

신세계 주류에서 취급하는 와인이라서 없냐고 하니깐 점원의 매니저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롯데백화점이라 취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소비자의 선택권이 철저히 무시되는 유통의 배타적 세계이다.


갈 길 잃은 사람처럼 그녀의 눈은 일시 허망함으로 들어찼다.

그녀의 계획에 오점이 생기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시 마음을 잡은 듯 그녀는 이탈리아 와인을 보자고 하였다. 이탈리아라면 그녀와 내가 가장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나라이다.

내가 ‘아마로네’ 와인 어떻냐고 물어보자 금방 희색을 드리우며 좋다고 한다.

그녀는 상징과 은유가 있는 예쁜 이름을 좋아한다. ‘아마로네’(Amarone) 얼마나 아로마 스럽고 아모르 스러운 상징인가.


로마(ROMA)를 거꾸로 하면 아모르(AMOR)가 된다고 말하던 그녀였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것도 ‘발음이 우아해서’ 라며 자신은 ‘유럽 허세’ 라고 비하인지 자랑인지 스스로를 지칭한다.


아마로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깃들여있는 베로나의 와인이다. 아파시멘토 기법으로 포도를 바람에 말려서 사용하기 때문에 아로마가 압축되고 깊고 진한 풍미가 있다. 알코올 도수도 높은 편이고 탄닌과 산미가 밸런스 있게 어울린다.


그녀는 와인의 지역과 품종 뿐 아니라 라벨의 디자인까지 세심히 고른다.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그녀는 흥미가 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게 무슨 또 이론인가 싶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심지어 국회의원 투표 때도 정당 투표 용지 디자인을 보고 고른다고 하니 심미적인 기준은 또 하나의 가치가 된다.


언제나 멋을 중시하는 여자이다. 맛집의 기준은 맛이 아니라 멋이라고 말한다. 멋이 없는 곳이 맛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 내용을 담보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아마로네’를 결제하려 하는데 그녀는 병을 오픈해서 달라고 한다. 나는 또 예상치 않은 돌발에 멈칫한다.


저녁 먹으려면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되는데. 그녀는 설명하지 않고 다시 한번 바로 오픈해달라고 점원에게 요청한다. 어차피 열어놓으면 와인 맛이 더 좋아지니깐 나는 더이상 부연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넘어간다.

와인을 따는 동안 나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오늘 덕수궁에 가기로 하였는데 그녀는 거기서 마시려고 미리 따놓으려고 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는데 그녀는 바로 다음 장소로 혼자 이동해 있었다.

백화점 푸드 코트 내에 있는 와인 샵이다 보니 바로 옆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그녀는 내 팔을 끌고 데려가 바로 명란 크림 파스타를 주문한다. 점심을 먹지 않고 온 모양이다.

‘토끼정’이라고 강남에서 유명한 줄 서서 먹는 집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테이크아웃 커피컵을 꺼낸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동공이 커다래진다.

지난 번에는 커플 와인잔을 세트로 들고 오더니 이번에는 커피 테이크 아웃컵을 씻어서 두 개 가져온 것이다. 역시, 그녀는 이벤트에 강하다.

방금 산 아마로네를 대담하게 따른다. 그럼 그렇지.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다 미리 계획하고 기획한 것이며 내가 그 장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커피컵에 와인을 따르며 스월링으로 향을 먼저 맛보고 입을 가져간다. 피노누아 같은 섬세한 아로마와 묵직한 말벡같은 힘찬 바디감이 강렬한 맛을 선사한다.

역시 선택은 탁월했다.


그녀는 무엇을 먹든 어디서 마시던 정말 맛있게 먹고 멋있게 마실 수 있는 그런 센스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자리한 테이블의 맞은 편 벽면에는 와인샵의 이탈리아의 지도가 그려져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이라며 말하는데 바로 와인 지도 그림이다. 피에몬테, 베네토, 토스카나의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나는 요즘 왠지 이태리 와인에 빠져있었다.

그녀를 만나면서 우연한 점들이 선으로 이어지는 그런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녀의 점과 나의 점이 일치할 때마다 사랑의 선들은 짝대기를 그리고 있었다.

한참을 웃고 떠들며 우리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적당한 취기가 오를 때쯤 다시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 덕수궁으로 향한다.

가을 낙엽을 보기위해 덕수궁으로 장소를 정한 터였다. 시청을 가로 질러 자리한 덕수궁은 작고도 아담하며 궁궐과 함께 유럽식 건축물도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마침 축제기간이라 풍악소리가 경내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시청사가 있는 도심 한복판에서 조선시대 속으로 타임트래블을 떠날 수 있는 곳, 서울은 참 매력적인 도시이다.


그녀는 해외여행을 갈 수 없게 되자 서울의 곳곳, 한국의 곳곳에 다시 애정을 품으며 색다른 감정을 품는 중이다. 그녀는 여행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여행이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장소가 아니라 '시선'이라는 그녀의 정의는 놀랍도록 작가다웠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백수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작가라는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무슨 책을 썼냐고 상대가 묻는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미리 답변을 정해 두었다.

“작가란 직업이 아니라 정신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작가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녀 다운 답변이 아닐 수가 없다.

늘 표현이 창의적이고 함축적이며 또한 새롭다.

문자로 보내주는 시적인 표현들, 운율과 라임까지 맞추는 그녀의 언어적인 감각은 탁월하다.


그녀는 내게도 자꾸 글을 써보라고 권한다.

쓰다 보면 잘 쓰게 될 거라며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복돋는다.

다음날 용기내어 몇 문장을 만들어 보내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가을, 덕수궁 벤치에서 이태리 베로나 줄리엣을 맛보다.

아마로네의 진수, 그 감미로운 향기는 따뜻한 입술을 타고 오랫동안 나의 뇌간에 남아 있으리라.


한 시간 후 그녀에게 답글이 온다.


발폴리첼라의 드넓은 빈야드에는

아마로네의 깊은 향이 흐른다.

입 맞추듯 타오르는 와인의 불꽃은

로미오의 격렬한 사랑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욕망을 해치리니.

짧고도 강렬한 클라이막스는

마지막 입맞춤으로 작별을 고하고

줄리엣의 깊고 낮은 탄식은

무덤의 꽃으로 영원히 피어난다.

윤기를 잃은 포도처럼 사랑을 박제한 자에게도

사랑은 짙은 여운을 남기고

기억의 산미를 더듬어 그날을 추억한다.


그녀의 문장들은 심쿵하는 구석이 있다.

와인이야기인 듯 하면서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인 듯하고 우리의 이야기인 듯 심층적인 구조가 표현되어 있다.

지난 밤이 연상되는 문장이며 우리만 아는 이야기이다.

어제 그녀와 나는 와인을 마시고 입술을 나누었다. 그리고 장소가 바뀌었다.


내가 다음 계획은 무어냐고 재촉하자 그녀는 짐짓 그런 거 없다고 기대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일정한 루트를 따라 이동하는 듯 하였다.

나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최종 목적지는 남산타워가 측면으로 보이는 호텔 20층이었다.


잠깐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며 이런 시추에이션에 당황하기도 하였으나 짐작과 달리 호텔방이 아니라 루프탑이었다.

한 밤중의 서늘한 공기도 이곳에서는 온화하게 느껴지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 근사한 공간을 둘이서만 공유할 수 있다.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시킨다.


그녀는 빨대로 알코올을 흡입한다.

나는 그녀의 혓바닥을 흡입한다.

“You are a nice kisser ”

그녀의 영국식 발음은 무척 섹시하다.

나는 좀더 대담하게 그녀를 탐닉한다.


짧은 탄식과 함께 클라이막스를 느끼려는 찰나,

우리를 방해하는 방문객들이 나타난다.

직장인 열 명이 떼거지로 들어온 것이다.

이제 둘만의 시간은 끝났다. 시끄러운 직딩들의 소음을 인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어떤 건물의 옥상광고판을 가르키며 무슨 뜻인지 보라고 한다.


“ Kiswell 고려용접공인데? ”

“ 키스 잘 해~~”

“ ㅋㅋㅋ ”


아쉬운 밤은 그렇게 절단되었다. 언제쯤 나는 용접에 성공할 수 있을까. 얼만큼의 온도와 압력 속에서 차

가운 금속같은 그녀를 녹이고 접합할 수 있을 것인가. 아,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