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츰 가을 색이 짙어지고 있다. 봄날의 피어난 꽃봉오리도 아름답지만 나는 저물어가는 것들을 더욱 사랑한다. 노을에 감격하고 눈물 흘리는 것도 그러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프다고 하지 않았는가.
노을 직전의 주황빛으로 타오르는 태양은 낙엽의 색을 닮았다. 붉어지기전에 노랗게 익어가는 법이다.
강남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공원은 양재천이다. 예전부터 나는 공원을 좋아하였다. 내 존재의 무게를 어쩌지 못할 때는 산책을 나선다. 길을 떠난다. 그리고 나무를 잎사귀들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나무는 홀로 서있어도 당당하다. 곧게 뻗은 척추는 하늘을 향해 서있고 땅을 향해 엎드린다. 여름날의 푸른 색이 빠진 잎새들은 노랗게 익어가고 붉게 울음을 토하고 마침내 바스라 진다.
오후 2시 그와 양재천에서 약속을 하였다. 총총걸음으로 바쁘게 걷는 나의 양손에는 짐이 한 가득이다.
내 나름의 ‘풀밭 위의 식사’ 준비물이다. 타탄 체크의 붉은 패브릭과 레드 와인, 그리고 커플 와인잔이 들려져있다. 나는 인상적인 인생샷을 만들려는 중이다. 누구도 나를 위해 행복을 하늘에서 떨어뜨려 주지는 않는다.
내가 스스로 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셀프서비스’ 그것이 나의 신조이다.
내가 감독이 되고 연출이 되고 작가가 될 수 있는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은 무척 재미있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위치정보를 주지 않았다.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너무 쉬우면 별로 재미없으니까.
“동선 따라 오다 보면 나를 찾게 될 거야~ ”
“무슨 동선? 어디서부터 인데? ”
내 발걸음의 흐름대로 그가 따라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서로의 동선이 일치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리고 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을 엿보고 싶었다. 내가 없을 때 나를 찾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전지적 시점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나는 적당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오분 또 십분이 지난다.
나의 성급함은 이내 참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 추적 단서를 보낸다.
부랴부랴 뛰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이고 얼굴에는 반가움과 안도의 표정이 보인다.
양재천 길에는 억새가 가득하다. 코스모스 꽃들도 심어졌다. 태양빛을 받은 풀과 잎들은 따스하게 빛났다.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금은 아늑하고 조금은 비밀스런 공간을 찾으며 이동한다.
평일 한 낮의 시간에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적당히 길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쇼핑백을 풀었다.
빨간 천 위에 와인이 세팅되고 커플잔이 놓여진다.
둘만의 공간에서 둘만의 와인을 따른다.
오늘을 위해 신중히 고른 와인은 미국의 burbon barrel aged wine 이다.
와인에 버번 위스키의 향이 묻어있다.
한 번 맛보면 그 독특한 맛에 매료된다. 와인의 풍부한 아로마에 위스키의 리치한 질감이 부가된다.
그는 감동의 시선을 떼지 못한다. 아무 날도 아닌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전개되는 놀라운 이벤트.
누군가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 생각하고 준비했다는 그런 마음이 고맙다고 느낀다.
평소는 건조하고 멋없는 나이지만 가끔은 이런 기특한 짓도 한다.
그냥 내가 좋아서, 상대방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리고 기억 속에 저장되고 싶어서.
해가 지면서 공기가 차가워지자 우리는 발걸음을 옮겨 이자까야로 향한다.
오랜만에 선술집 분위기의 이자까야는 따뜻하고 아늑하다. 마치 삿뽀로에 온 듯하다.
히레사케를 시키고 잔을 감싸쥐며 손을 데운다. 그는 일본 스타일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마시고 천천히 음미한다. 절대 많이 먹는 법이 없다. 그리고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천천히 듣고 천천히 생각한다. 나는 쉴새없이 끝도 모를 대화를 이어간다.
그는 나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그림 엽서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었다.
지중해 산들바람이 부는 언덕, 양귀비 꽃밭에서
파스텔톤 원피스에 머리에 쓴 페도라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잡고 서있는 여인.
생각의 속도는 우주의 빛보다 빠르지만 가끔은 천천히 거울을 보며 자신의 미를 감상해도 좋을 것 같다.
이 문장보다 가슴을 파고 드는 것은 마지막 문구이다.
" 50일째 바라다본 그녀에 대한 단상 "
그는 날짜를 세어본 것이다. 그 순수한 고백이 설레여서 가슴이 쿵닥거린다.
오십 일을 세어보다니…
50일은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없는 기간이다.
나의 연애는 두 달을 넘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 달 사이에도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긴장으로 고조되다가 이내 추락하였다.
그것은 관계의 밀도와 강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급하게 압축될 수록 이내 폭발하여 공중 속으로 사라진다.
서로를 위해 신중하게 접근한 태도는 더욱 소중한 만남을 이어가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기다려주고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부담을 주지 않았던 그의 태도가 적절했다. 한밤 중 '보고싶다'는 말 대신 '책을 보고 싶다'고 말을 하였고 '같이 있고 싶다'는 말 대신 '같이 까페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하였다.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는 전화를 하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50일째 바라다본 그녀의 단상’
이 문장 하나에 모든 것이 느껴진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만나온 것이 아니라 관찰해본 것이다.
그리고 바라만 보아도 좋았다고 말한다.
나는 오늘 밤을 시를 써서 그에게 건넨다.
차츰 짙어지는 가을날
시민의 숲, 사색의 벤치에 앉는다.
차가운 공기는 밤을 가르고
시린 콧날이 서로 부딪힌다.
36.5도의 체온은 한쪽 옆구리를 데워주었고
13.5도의 와인은 혀를 타고 온기를 불어넣는다.
이내 공기의 온도와 밀도가 달라졌다.
서로의 숨결을 타고 들숨과 날숨으로
같은 공기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