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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균형 Oct 12. 2022

feat.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여름이 오기 전에 다이어트를 잠시 했었어요. 오래간만에 식단도 하고 운동도 일주일에 2번씩 꾸준히 하고요. 근데 이제 굶는 다이어트는 못하겠더라고요. 탄수화물을 극도로 제한하되 허기가 지지 않도록 유지하고, 단백질과 채소 위주로 건강한 식단을 유지했어요. 선생님은 운동을 하고 난 후에 반드시 단백질을 먹으라고 하셨어요. 운동은 근육에 미세한 칼집을 내어 틈을 만드는 것이고 운동 후에 단백질을 섭취해야 그 틈 사이로 들어가 근육을 키워준다고요. 얘기를 듣는데 소름이 돋았어요. 매끈한 근육을 칼로 스윽 긋는 느낌이 들지 뭐예요. 아, 보이지 않는 근육을 키우는 데에도 틈이 벌어져야 하는 거구나. 틈을 벌리는 것은 늘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운동이 어려운 건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지금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예전에는 고슴도치처럼 늘 바짝 긴장한 채 여유가 없었어요. 누구 하나 쉽게 말 걸 틈 없는 사람이었죠. 회사를 옮겨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였어요. 사무직으로만 일하다가 현장에 오니 업무강도가 약 3배는 높아지더라고요. 하루에 전화만 몇십 통, 핸드폰에 남아있는 통화 내역이 3,4일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어요. 저는 힘들어도 살이 안 빠지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진짜 엄청나게 힘이 들었나 봐요. 한 달 동안 4kg가 그냥 빠졌어요. 건강한 다이어트는 아니었죠. 하루는 이 팀, 저 팀, 그 팀 모두 촉박한 일정으로 저를 독촉하기에 하루 마음먹고 당시 1주일 안에 해결해야 할 일들을 엑셀에 정리했는데, 대충 80개 정도로 추려지더라고요. 한 아이템당 아무리 못해도 한나절은 소요되는 일들이었는데, 80개요? 이 상태면 공사가 2달은 지연되겠군요. 수치로 정리된 엑셀 파일을 보여주며 이 부장, 저 부장, 그 부장에게 내가 일이 이렇게 많으니 나 좀 살려주소!라고 읍소했지만, 그분들이라고 방법이 없더라고요. 각자의 할 일이 있으니까요.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한 영감님이 있었어요. 협력업체의 제 담당자였는데요. 첫인상은 살짝 무서웠어요. 스크루지 영감 같은 느낌이었죠. 와, 저 사람을 내가 구워삶아서 일을 시켜야 한다고? 한숨이 절로 나왔죠. 한두 번 저랑 회의를 하시더니 뜬금없이 말하시더라고요.  'ㅇ대리,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너무 뻣뻣해. 뻣뻣하면 부러지게 되어있어.' 어리둥절했죠. 아니,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일을 열심히 하지 말라고요? 그러면서 이러시는 거예요. '한 템포 늦게 일해. 먼저 문제를 예상해서 꺼내지 말고.' 문제를 알고는 있되,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하나씩 해결방안을 제시해 주는 것이 현자라면서요. 아니, 지금 공사판에서 일하는데 '현자'가 웬 말입니까. 그런데 이 영감님이 가끔씩 툭툭 던져주는 말이 재미있더라고요. 처음 들을 때는 어이없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말이 또 맞아요.  


    여기까지만 보면 이후로 제가 일을 아주 평화롭게 잘했을 거라고 생각되시겠지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저 원래 엄청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일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영감님이랑 회의하면서 왁왁 소리 지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물론 각자의 입장 차이가 있을 수는 있죠. 일을 주는 기업의 담당자와, 일을 받아서 하는 업체의 담당자가 만났으니 의견 차이가 없을 수는 없어요. 근데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이 영감님은 저를 살살 긁어서 소리까지 지르도록 만드는 거죠.

    

    하루는 업무 얘기 중에 사무실에서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게 되었는데, 제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일순간 사무실이 조용해졌어요.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이 와서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로요. 평소에 일을 도와주지도 않던 사람이 보통 이럴 때 도와줄 것처럼 하는데, 어림없죠. 이미 소리까지 지르고 있는 마당에 앞뒤가 보이겠습니까. '저 지금 제 업무 보는 중입니다. 목소리는 조금 낮추겠습니다.' 여직원 도와주겠다는 엄청난 정의감에 취한 사람들이 머쓱해져서 돌아가요. 이러고 나면 그 영감님은 껄껄 웃으면서 가버리는 거예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와 무슨 저런 xx가 다 있지, 쌍욕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한 시간쯤 후에 영감님한테 전화가 와요. 'ㅇ대리, 내가 당신 도와준 거 알아? 당신 힘들게 일하는 거 온 사무실 사람이 다 봤잖아. 이제 거기 사무실 사람들이 쟤는 바쁘고 힘들게 일하는 애라고 생각해서 다들 도와주려 할 거야. 일은, 내가 곤경에 처하게는 안 하니 걱정 말고.' 이렇게 통화를 하다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거죠.  ...롸?


    영감님은, 양손에 방패 들고 헛둘헛둘 열심히 막고 있는 저의 옆구리를 부채로 툭 찔러요. 헙, 방어도 못하고 웃긴 모양새가 되잖아요? 그럼 방패를 내려놓으라고 하는 거죠. 그걸로 막아봐야 소용없다고. 틈 벌린 채로 조금 허술하게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존법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즈음, 시시껄렁한 농담 중에 한 문장을 던지시더라고요.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그러니까 조금 부족한 듯이 살아요. 남들 눈에 좋아 보이려고 애쓸 필요 없어. 그래 봐야 남들이 부러워서 시샘밖에 더하나. 뜻은 궁금하면 찾아보고.' 무심코 던지시면 저는 또 허둥지둥 받아요.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더라고요. 얻기 힘든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둑질하지 않게 된다. 남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함께 얻으려 애쓰지 말자.  


    예전에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할아버지 선생님인 데다 늘 알 수 없는 말만 꺼내놓는 분이셨기에 애들은 졸리다며 무시하기도 했는데, 이 분의 수업을 곰곰이 듣다 보면 허투루 하는 얘기가 하나도 없으신 거죠. 제가 취직했다고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일 거예요. 자신이 아들에게 한 얘기라고 하면서 일러주셨어요. '승진을 너무 빨리 하려 하지 말고, 남들보다 한 템포씩 늦게 하는 것이 좋아.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수 있지. 1,2년 빨리 해봐야 주변인의 질투만 사게 되는 거야.'


    우리는 보통 쫓기듯이 살아가잖아요. 취직해야지. 결혼해야지. 승진해야지. 아기 낳아야지. 딸은 낳아야지. 뭐든지 잘해야지. 남들에게 무시당하지는 않게 살아야지. 등의 허공에 날리는 채찍과도 같은 얘기들에 허덕이고 있죠. 정체도 모르는 뙤약볕 아래에서 온 몸에 땀이 나도록 달리라고만 하는데, 와중에 걸어도 된다고 얘기해주신 것 같아요. 더울 때는 걸으면서 주변인들을 응원하고 날 좀 선선해지면 달려도 된다고요. 알고 보니 영감님이 하신 얘기의 대부분은 손자병법과 도덕경에 나오는 얘기들이었어요. 어휴 진짜 영감 맞네요. 그래도 글로만 읽던 활자가 살아서 제 눈앞에 펼쳐진 느낌이 들었지 뭐예요.


    이후로부터 지금까지도 늘 노력하고 있어요. 너무 앞서 나가지 않기를. 너무 곧게만 살지 않기를. 나사 하나쯤 풀어두고 살아가기를 말이에요. 근육에 미세한 틈 사이를 단백질로 채우듯, 제 인생의 틈을 벌리고 벌려 그 사이에 채울 것을 찾으려고도 노력 중이에요. 잠시 눈 감고 보면 채울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사랑, 여유, 쉼, 타인에 대한 응원, 시기하지 않는 마음, 내면을 채우는 노력, 수련하는 마음 등. 남들 다 원하는 다이아몬드 말고, 그저 돌멩이, 작은 조약돌 되어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이왕이면 얕은 시냇물 흐르는 곳에 있으면 좋겠어요. 시냇물 사이 반반한 조약돌도 흘러 흘러오기까지 수많은 이야기 담고 있겠죠. 작은 조약돌 틈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과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내어보는 거예요. 졸졸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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