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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균형 Oct 21. 2022

공(空)

feat. 무위의 삶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태어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었고, 갈 때에도 모든 허울 내려놓고 한 줌의 흙이 되어 사라지겠죠. 허물과 같은 육체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아도 포함해서요. 수정체에서부터 태아, 신생아, 영아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의 나는 기억조차 없지요.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기 전에 서서히 나의 영과 육은 서서히 쪼그라들 테고 내가 나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닿게 될 무위의 상태에 조금 더 빨리 도달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지나는 삶을 터널이라 한다면요, 터널을 밝히던 조명을 하나씩 꺼 버리고 터널 끝에서 흘러오는 빛에 의지하여 삶의 통로를 걸어가는 거예요. 날씨가 맑은 날은 조금 더 밝은 빛이 오겠고, 비가 와서 어두운 날은 조금 더 캄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것들을 오감으로 느끼며 걷다 보면 반딧불이가 제 옆으로 날아올지도 모르죠.  


    어릴 때는 막연히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대단한 성취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목표를 높이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것을 이룬다고 삶이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그 첫 번째가 수능이었죠. 수능만 보면 인생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며 머리에 띠 두르고 달려왔는데 막상 열어보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대신, 해야 할 과업의 난이도가 높아지던데요. 목표를 달성하면 할수록 자꾸 늘어나는 과업을 허들 넘듯이 헉헉대며 지나오는 동안 막연한 목표는 성공한 삶에서 평범한 삶으로 바뀌었어요. 평범하게 사는 게 저는 가장 어렵던데, 아닌가요. 사실 평범하다는 것도 제 스스로 세운 기준은 아니에요. 누군가와 비교하였을 때 평균치일 뿐이죠.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남들 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가게 두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괜한 자존심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기준은 따르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제 안에 기준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요. 다시 그 기준값에 대한 비교가 따라오게 될 테니까요.  


    만일 외부의 시선과 기준을 내 인생에서 모두 걷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에요, 겉껍질을 모두 긁어낸 알맹이는 아마 아무 욕망도 없는 상태일 거예요. 오로지 생존, 살아 숨 쉬는 일에 대한 일이 전부가 될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저는 제 안에 있는 모든 욕망을 없애보고 싶어요. 설령 그것이 내 존재까지 지워버리는 일이 될지라도요. 어떤 불순물도 없는 완전 투명한 상태가 되기를 소망해요. 어쩌면 이 상태가 죽음일지도 모르겠네요. 생애 대한 아무 집착 없이 모든 욕망이 소거되는 상태를 거쳐야 비로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거죠. 혹은 순전한 상태로 우주상에 동동 떠다닐 수도 있고요. 그저 한 줌의 흙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죠.


    무위의 삶을 지향하지만 아직 제가 있는 곳이 그 지점은 아니에요. 아직 한참 멀었어요. (아직은 우주상에 동동 떠다니고 싶지 않아요..) 인식을 하고 보니 생각보다 제가 바라는 것이 많더라고요. 계절마다 옷도 사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여행도 철마다 가고 싶고요, 배우고 싶은 것도 아직 많고요. 게다가 아이가 생기니 아이들을 생각해서 고려해야 할 삶의 지점들이 더 많이 생겨났어요. 뭐든지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라지요. 이렇게 책임져야 할 것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무책임한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해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통로에서 어느 쪽으로도 한 발짝 움직이지 못하고, 터널에는 여전히 조명 켜 두고 있는 상태일 거예요. 말만 번지르르하죠 뭐.


    알고 보니 ‘무위’가 진짜 번지레한 말이더라고요. 중국 철학에서 주로 도가가 제창한 인간의 이상적인 행위를 말해요. 여기서 비롯된 '무위자연'은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삶을 의미하고요. 마음을 고요히 비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어딘가에 살고 있겠군요. 저 혼자 이상한 망상을 하는 줄만 알았는데 내심 반가웠어요. 하늘 아래 새로운 생각은 없다는 것도 실감했고요. 뛰어봤자 벼룩이군요. 벼룩의 수준으로 생각해서, 우선 소유하지 않는 삶으로 범위를 좁혀 보려 해요. 0이 될 수 없다면 0.0001, 아니 0.1 언저리라도 되어보고자 하는 거죠. 도가도 비상도 아세요? 말하면 도가 아니라네요. 근데 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들어갔으니 무위는 아니군요. 역시 어려워요.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저 멀리까지 가서 고민해봐도 용수철처럼 결국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요. 저 멀리 죽음까지 갔다가도 지금은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살아가자는 식상한 매듭으로 묶어버리고 말죠. 그럼에도 이 모든 공상은 내게 주어진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을 잘 살아 내기 위해서일 거예요. 돌고 돌아 다시 '지금'이네요. 지금을 잘 살기 위해 내게 맡겨진 바 소임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일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나를 비워내는 삶을 살아야 할지는 끊임없이 고민해야죠. 다행히 실마리는 찾은 것 같아요.

less is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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