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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록 Jan 29. 2019

백일의 낭군님(2018) 05, 그녀의 상실수업

매화 시절을 그리며, 벚꽃 나날을 꿈꾸며

12회 부터 13회 까지.


이번 회차는 전과 후의 흐름이 확연히 구분된다. 극중 인물들이 이별을 맞이했으며 그로 인해 극 전개의 주된 공간이 바뀌었다. 두 주인공이 이제야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미래를 그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이별이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고 슬픈 감정이 짙게 배어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상실 수업>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저작인데 여기서 이르는 '상실'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이르기도 하니 이별 수업이라 해도 무방할 듯 하다. 그가 말하는 죽음(이별)을 받아들이는 5단계는

부인 - 분노 - 협상 - 우울 - 수용

의 5단계이다. '애도의 단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략히 적어보겠다.


1단계의 주된 감정인 '부인'은 받아들이기 힘든 이별로 상처를 받고 현실을 부인한다.
2단계의 '분노'는 현실은 받아 들이지만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단계이다. 마구잡이로 화를 내기 때문에 주변인도 몹시 힘들다.
3단계의 '협상'은 사실상 더 이상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을 깨닫고 현실에서 살아가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는 단계이다. 일종의 포기라고 한다.
4단계의 '우울'은 가장 무기력한 단계이다.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다가도 나타나는 우울감인데 모든 일에 초연해지고 멍한 상태가 된다.
5단계의 '수용'은 평정의 시간이다. 앞의 네 감정이 지나간 후 평정의 상태를 유지하며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 보게 된다.

홍심은 이 상황이 무엇이냐며 그럴 리 없다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1단계를 거쳐 화를 내고 전에 없던 폭력적인 모습의 2단계(신을 집어 던진다거나 거칠게 말을 한다든가)를 거쳐, 그래도 정리를 하려 노력하고 떠나서 새로 시작하려는 3단계를 지나 어떤 것에도 쉽사리 웃기 어려운 4단계의 상태를 겪게 된다. 4단계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한 번 1-4단계를 찬찬히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듯 하다. 그리고 새로운 사건과 그 이후의 상황도 말이다.


원득은 율로서 궁으로 돌아갔고, 홍심은 홍심도 이서도 아닌 채로 남아서 떠날 준비를 한다.

세자 책봉식 진행 중에 모든 조정 대신들이 보는 앞에 다시 나타난 율.

서원대군의 세자 책봉식 중 등장한 율의 모습을 보던 중 눈에 띄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원래의 율이었다면 그 길을 걸을 때,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구지도 않았을 것이고 걸음을 그리 빨리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율이 디테일하게 표현된 것이 아닐까 싶다. 율인척 하는 아직은 원득인 사내를 말이다. 대본집에는 '표정없이 걷는 '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발걸음도 모습도 100%의 율은 아니었다. 20%의 실마리만 율이었다. 홈심과의 혼인 길에서도 말한 적 있듯, 종종걸음을 치지 않았던 율이었다.무표정하게 땅으로 시선을 꽂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궁으로 들어가기 전 아침, 세자빈과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성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상들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이었다면 송주현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 홍심의 안전을 위해 율로 살아야 한다는 김차언의 말에는 감정이 만연한 반응이었다. 혼란스러운 율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던 장면이었다.

그도 홍심을 생각하고 홍심도 그를 생각한다.


알 수 없는 곳에서 깨어난 후 오라버니와의 대화 장면에서 그녀의 상실 단계가 드러난다.

 원득이가 놀랐을 것이라며 급히 집에 가려는 홍심을 붙들고 그는 세자이며 다시는 만나선 안 된다고 하는 말에 홍심은, 왜? 라며 오라버니에게 보이지 않던 거친 눈빛과 말을 보인다. 그러고는 원득이에게 직접 듣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믿지 않겠다는 현실 부정의 모습을 보인다.

그가 해주었던 든든한 말도 아직 생생하다.


너 두고 절대 어디 안 간다. 나는 네 낭군이니까.

그의 말이 사무친다.

아무리 괴로워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를 잊으려 꽃신을 저멀리 던지지만 이내 울며 찾아서는 끌어 안고 만다.


꽃신은 그와의 행복한 기억이며, 지금의 매화로서, 다음의 벚꽃을 기다리는 매개이다.

꼭 맞는 벚꽃이 아니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매화 시절이었다.


뜬금없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하나 확실히 알게된 것이 있다. 매화와 벚꽃의 차이이다.


매화는 꽃잎 전체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지만 벚꽃은 잎에 오목한 홈이 파여있습니다. 꽃받침과 꽃자루를 보면 구별이 더 수월해집니다. 매화는 붉은색 큰 꽃받침에 꽃이 가지에 달라 붙어 있는 반면 벚꽃은 2~3cm 가량 제법 길게 나와있는 꽃자루에서 피어납니다. 특히 매화는 그윽한 향기를 내지만 벚꽃은 향기가 거의 없는 것도 큰 차이입니다.                                   _ “벚꽃이 아니었네”…매화ㆍ벚꽃 구별 방법은? | 연합뉴스TV ::


이 드라마 속에서 율은

예쁘게 눈을 또옥똑 흘리는 연기가 아닌

공허함과, 떨림으로 슬픔의 감정을 표현한다.


기억을 잃고

새로운 기억을 더한 본인에게

세자의 과거는 무겁고 혼란스럽다.


게다가 처와 복 중 태아까지 있다는 생각에 아마도 그는 자괴감마저 들었을 것이다.

본인이 잊은 기억에 자신이 책임져야 할 나라의 일들과 세자로서의 책임, 그리고 지아비로서 아버지로서의 의무 또한 무거웠을 터이고.

송주현의 작은 집에 살 적에도 원득의 뒤로 보이는 화려한 병풍이 잘 어울렸었는데

제 자리를 찾은 율의 병풍은 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준다.


기억은 어쩌면 그의 자아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낯선 궁 안에서 느껴지는 환시.

홍심이었다. 도배우는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환시 한강우 역을 맡은 바 있다.


그랬던 도경수 배우는 제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환시로 꺼내어 놓는다.

몇첩 반상에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점 점 야위어 가는 율 앞에 나타난 홍심.

이렇듯 많은 찬이 무엇이 필요하냐, 백성들의 밥상을 본 적 있느냐 내관에게 묻는 그 앞에 나타난 그녀.

너무 놀랐지만 눈을 감았다 떠 보니 그녀는 또 사라지고 없다.


이럴 때 보면 남배우가 참 예쁘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냥 예쁜 것 보다는

맑게 빛난다.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배우가 계속 나오는 것 같다. 상대 배우와의 케미 또한 제나 긍정적이고.

시연 중에도 나타난 홍심.

율은 당분간 시연을 물리기로 한다.


어딜 가도 그녀 뿐이라 비할 바 없이 괴로울 뿐이다.

서원대군과 마주친 율

서원 : 저는 저하가 원망스럽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이미 모두, 저하의 것이라서요.

 : 나 또한 원해서 가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다.

서원 : 눈빛이 달라지셨습니다. 용포만 갖춰 입었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 그럴지도 모르지. 궁 밖에서의 백 일은 몹시도 긴 시간이었으니.


율은 100%의 율이 아니었다. 궁 밖에서의 백일은 몹시도 길고 밀도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허니 이렇듯 나타나도 소용없다. 네 곁에 갈 수 없으니. 나에겐 이미 오래 전, 혼인한 빈이 있고... 더욱이 나에겐... 태어날 아이가 있다.

말은 그렇게 하고 홍심이 가버리자 먹먹한 두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진다. 쉬이 볼 수 없었던 그의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만다.


평생 누군가를 마음에 안고 그리워했던 그였다. 그 아픔을 누르느라 더욱 세고 못된 모습을 보였었는데, 기억을 잃으며, 좋은 사람을 만나며 마음의 문도 이미 열려버려서 더욱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미 열린 것은, '이미 잡힌 손'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간 눌러왔던 감정이 넘치고 만다.

참지 못하고 일어난다. 감정이 넘친다.

홍심에게로 향한다.

그녀와 함께 있던 곳으로 간다. 함께 있던 그 집으로 간다.

두 사람이 한장면에 담긴다.

한 사람은 둘이 있던 곳을 보고 또 한 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있다.

하지만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도망치듯 가는 홍심을 붙잡은 율의 목소리가 있었다.

홍심 : 세자 저하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궁으로 가셨다 들었는데 여긴, 왜 오셨습니까?

 : 보고 싶어서. 너 없인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홍심 : 그래서, 어쩌시려구요? 절 데려다, 후궁이라도 삼으시게요?

 : 못할 것도 없지. 난 이 나라의, 세자인데.

홍심 : 궁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하는 일이 고작, 여인을 취하는 일입니까?

 : 넌 이렇게 떠나도 상관 없다는 것이냐? 나와 이렇게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냐?

홍심 : 예.

 : 우리가 한 게 뭔데, 우리가 한 게 사랑이 아니면, 그 게 무엇이냐...

홍심 : 세자빈 마마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저하께서 여기 오신걸.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오지 마십시오, 더는 한 발짝도. 이것이 우리 인연의 끝입니다.

부러, 더 독하게 이야기한 홍심.

돌아서서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그가 자신을 볼 수 없는 시선에 오자마자 무너져버린다.

현실적인 슬픔을 잘 풀어낸다 싶었던 남지현 배우의 연기였다.

평범한 우리네 눈물을 잘 담아내서 더욱 공감을 이끌어낸다.

홍심이 4단계의 우울을 온전히 느끼지도 못 하게 세자인 율에게 위기가 온다.

세자 책봉식으로 이유로 방문하려던 사신단의 방문에 율의 온전치 못함이 드러날 위기였을 뿐 아니라

그의 영식인 줄 알았던 영애가 사라져 더욱 위기를 맞게 된다.


* 이 작품에서 여성을 수동적인 역할로만 두지 않았다고 하면, 다소 인위적인 삽입의 느낌은 있지만 '해결사 홍심이'의 면모일 것이다.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다소 만화적인 연결점이긴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 호신 정도의 무예로 무뢰배와 맞서는 등의 장면이 과장스럽긴했지만 그녀의 성향과 극적 위치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홍심은 율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이다.

그러나 그는 보고 만다.

자신을 도우려다 또 얼굴이 상한 홍심을.

그의 눈은 또 먹먹해진다.

그녀가 다쳤다. 두 번 다시 사내들의 그러니까 본인이 엮여있는 일에 홍심이 다치게 되는 일이 없었으면 했었다. 그런데 또 홍심은 다쳤고 이제는 직접 그녀에게 가 괜찮냐고 묻고 다독일 수가 없다.


사람마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권력을,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사랑을 중하게 여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겠다는 왕학사의 영애의 말을 들어주자 한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중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다고 그리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사랑에 대면, 할 수 있는 것은 하기를 안타까운 마음에서 바랐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도 연회가 끝나기 직전 무사히 영애를 데려온다.

제윤을 데려다가 질투와 압박을 가하는 율.

민들레.


<백일의 낭군님>에서는 부모 자식 간의 정을 제외한 정으로 3개가 있다. 율과 이서의 정, 무연과 소혜의 정, 그리고 홍시을 향한 제윤의 외사랑.


맞닿았던 두 사랑에는 꽃이 피었다. 벚꽃민들레.

마지막 리뷰에서 이 부분은 자세히 기록해보려 한다.

홍심은 원득의 저고리를 만지며 그를 기억하다가 아버지에게 걸리고 만다.

잊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잊을 수 없으니,

나도 노력하고 있으니 제발 '빨리' 잊으라고는 하지 말아달라 눈물로 호소하는 홍심.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걷는다.

내관이 수상하여 따라가본 곳에서 빨간 댕기를 발견한 율.

이서와의 기억을 마주한다.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

틀림없이 그녀였던 것을 떠올리게 된다. 또다시 함께 였음을 알아챈다.

언제나 함께 였음을, 언제나 이어져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웠던 달빛이었던가.
아득히 깊어진 밤이면 숨었던 그리움, 고갤 드네.
지키지 못한 약속들은 별들처럼 떠다닌 긴 밤에 불어온 바람
그대 숨결인 것만 같아 괴로웠다.


이 작품의 ost인 첸의 <벚꽃 연가>가 가장 아련하게 울려 퍼진 시점은 14회의 이 장면이 아닐까 한다.

안타깝고 애절한 마음을 애절하게 표현해내었다.

이서야, 나다 팔푼이.
저하께서 그 이름을 어찌 아십니까...?

도배우의 이렇게까지 강아지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상대방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눈빛.

좀처럼 누군가에게 바라지 않고 내부에서 답을 찾는 그가 외부에 갈구하는 모습은 보든 이로 하여금 깊은 집중을 불러 일으켰다. 사실 15, 16회의 위기와 해결 부분보다도 가장 긴장감 있고 둘에게 많은 집중이 있었던 부분은 14회의 이 장면이었다.


둘이 떨어져있으면서 극대화된 그리움, 그리고 감정의 넘침이 잘 표현된 두 회차였다.

가장 긴장감이 고조된 부분이었다. 처음으로 이어졌고 처음으로 그리워하는 줄 알았으나 평생을 그리워해온 두 인연의 만남이었다.


이제 다음 글은 <백일의 낭군님>의 마지막 리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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