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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고래 Jun 08. 2020

벨에포크에서 만나는
낭만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사랑

카페 벨에포크(La  belle epoque, 2020)를 보고

카페 벨에포크(La  belle epoque, 2020)를 보고


솔직히 "이 영화가 엄청나게 보고 싶어서 영화관을 찾았다.."라는 이유보다는 "영화관에 가고 싶은데 그중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이 영화였다.."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오랜만에 찾은 영화관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고요한 디스토피아가 실현되면 영화관이 이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직원도 없고 손님도 없었다. 깨끗하고 조용하기까지 해서 사설 독서실 정도의 쾌적함이 느껴지는 영화관 매표소에서 티켓을 발권하며(그것도 할인쿠폰까지 썼는데) '사람이 없어도 이렇게 쾌적한 환경을 유지해주는데 팝콘과 음료라도 사야 영화관 운영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취준생답지 않은 주제넘은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접어두고 상영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개월 만에 찾은 영화관 내 모든 상영관의 좌석이 리클라이너 소파로 바뀌어 있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나답지 않게 매점에서의 소비에 인색했음을 후회했고, 내 좌석의 한 구석에서 언제부터 짱 박혀 있었는지 모를 카라멜 팝콘을 발견했을 때는 이 좋은 소파를 노동력의 낭비 없이도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몸소 실현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내 줄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기에 리클라이너 소파에 눕다시피 파묻혀 다리를 쭉 뻗고 낭만과 감성에 푹 젖을 수 있었다. 편안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린 덕분에 영화에 더 잘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바웃 타임 류의 로맨틱 코미디 시간여행 영화로 포인트를 잡은 광고를 보고 영화를 봤는데, 나는 어바웃 타임과는 좀 결이 다른 영화로 느껴졌다. 어바웃 타임처럼 가족적인 분위기가 나타나고 삶의 따뜻한 교훈이 뇌리에 딱 박힌다기보다는 프랑스다운 개인주의적 분위기와 예술 영화에서 많이 나타나는 모호함이 더 짙게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 모두 만족스럽게 봤고 모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글로 감상을 남기거나 다른 사람과 영화 이야기를 할 때는 영화를 보고 난 이후의 감상이 말로 표현이 될 정도로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이 좋겠지만, 굳이 평론가처럼 영화 감상을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감상이 깔끔하게 딱 떨어지지 않으면 좀 찝찝해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내게는 모호함 그 자체를 즐기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어차피 같은 영화라도 누구와 보는지, 어디서 보는지, 언제 보는지, 몇 번 봤는지에 따라 그때그때 나의 감상과 생각이 변하기 때문에 나는 영화를 감상하는 그 순간의 직관적인 경험에 의의를 두고 보는 편이다. 그러니 모호함도 하나의 경험으로 다가올 수밖에. 


어쨌거나 어바웃 타임을 생각하고 가신 분이라면 좀 실망하실 확률이 높을 영화이고, 예술 영화스러운 애매함과 모호함(그렇지만 그 정도가 심하진 않아요!)이 극도로 견디기 힘든 분들도 만족하기 어려운 영화일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 풀어내는 것도 어렵고. 특히 빅토르와 마르고의 사랑이 직관적으로 와 닿기는 하는데 명쾌하게 이해되지는 않아서 글을 쓰다 보면 좀 생각이 정리될까 싶은 마음에 써보려 한다. 


(스포일러 있음, 스포일러 강도 上)




 빅토르와 마르고의 사랑
빅토르는 마르고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마리안을 연기한 마르고를 사랑한 걸까?

빅토르에게 마르고는 처음엔 그저 1974년에 그가 반했던 마리안의 모습을 재연하는 젊은 여배우에 불과했다. 마르고를 매력적인 아가씨라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다신 볼 수 없는 1974년의 마리안과 함께하고 있다는 마음이 그를 더 행복하게 했다고 본다. 그러니 마르고를 처음 만났을 때 과거에 마리안이 기타 치는 남자에게 어떻게 했는지, 무슨 술과 음식을 시켰는지, 어떤 전화였는지 일일이 코치해주지 않았겠나. 빅토르는 그날의 대화까지 모조리 기억하고 재현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후 파티를 재현한 장면에서 마리안과 다르게 춤을 추고, 짜인 대본에서 벗어나 애드리브를 하는 마르고의 모습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그때부터 이미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던 걸까? 마르고와 애증관계의 연인 앙투안 역시 이 미묘함을 눈치챘는지 그렇게 공들인 1974년의 장면 재현을 중단시키고 마르고와 빅토르를 떼어놓기 위해 절뚝거리며 달려간다. 세트장을 벗어난 마르고와 빅토르는 남녀관계 시작의 가장 기본인 공감대 형성에 돌입한다. 마리안과 말도 안 통하고 추구하는 생활방식도 달라 힘들어했던 빅토르와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고 정신상태가 제멋대로 오락가락하는 앙투안에 지쳐버린 마르고. 둘 다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해주지 못하는 상대방으로부터 상처 받은 사람들이기에 더 잘 통했다고 생각한다. 의뢰인 맞춤 시간여행 속에서 만남과 대화가 계속되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시작되었고 빅토르에 대한 감정을 깨달은 마르고는 그에게 말 한마디 없이 일을 관두고 사라져 버린다. 사실 마르고가 사라진 이유에 대한 설명은 내 가설에 불과하다. 혹은 마르고가 빅토르를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자신을 향한 빅토르의 감정을 눈치채고 그의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떠난 것일 수도.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앙투안을 미워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녀였기에 더 이상 빅토르를 사랑할 수도 혹은 빅토르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않았을까. 후에 마리안은 앙투안의 잔인한 연극에 동참해 빅토르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도록 한다. 그녀는 상당한 죄책감을 가진 듯 하나 직후 앙투안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들인다. 


빅토르는 연극으로 꾸며낸 마르고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마리안과 살던 집으로 돌아오지만 마리안의 옆 자리는 내연남이 차지하고 있다. 빅토르는 마리안에게 시간여행 체험, 마르고와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간여행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을 마리안에게 건넨다. 그 후 빅토르의 시간여행 체험에 현재의 마리안이 스며든다. 마리안은 빅토르가 반했던 과거 그녀 자신의 모습을 재현해보지만 빅토르는 1974년의 마리안을 재현한 마르고를 만났을 때 보다 조금 시큰둥해 보인다. 아내의 불륜을 눈으로 목격한 입장에서 아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해서 상처가 쉽게 아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뭔가 불륜에 대한 상처 때문에 마리안에게 시큰둥하기보다는 진짜 보고 싶은 사람이 앞에 있지 않다는 것에 좀 더 아쉬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그가 진짜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1974년의 마리안인걸까, 아니면 그걸 재현하는 마르고인걸까, 아니면 그냥 마르고라는 사람 자체인 걸까? 이게 나를 좀 혼란스럽게 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담배연기와 함께 사라진 잔상에서 여전히 그는 마리안을 재현한 빨간 머리의 마르고를 떠올렸지만, 마리안이 젊었을 적 자신이 했던 것처럼 다시 스카프를 떨어뜨렸을 때 이번엔 그는 스카프를 줍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가 마르고를 꽤 깊이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1974년의 마리안과의 사랑 또한 다시 경험하고 싶을 만큼 소중한 사랑 아닌가. 마르고와의 사랑을 낭만적인 현재의 사랑으로, 노년의 마리안과의 사랑을 현실적인 사랑으로, 1974년의 마리안과의 사랑을 낭만적인 과거의 사랑으로 표현해봄으로써 낭만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모두 관통하는 빅토르의 사랑을 통해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지도 생각해봄직하다. 카페 벨에포크를 통해서 그의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를 다시 경험했지만 새로운 벨 에포크를 만들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제목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보며 글을 맺고자 한다. 한국어 제목은 '카페 벨에포크' 이지만 원제는 La belle epoque이다. 원제에서 장소의 명칭이라는 느낌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로 썼을 것 같은데. 원제의 La belle epoque는 '좋은 시절'을 뜻하는 고유명사의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영화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카페 벨에포크가 매력적인 장소이긴 하지만 감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빅토르의 좋은 시절 아니었을까...? 카페 벨에포크는 그가 그의 좋은 시절을 찾아가게 해주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할 뿐이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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