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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소풍 Feb 03. 2021

일상

 일 년 가까이 집에 와있던 큰아들이  다시 미국으로 갔다. 학기도 시작했고 더 이상 시차를 이겨가며 온라인 수업을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교 유학생 큰아들. 고등학생 둘째 아들. 재택근무하는 남편까지  코로나 덕분으로 네 식구가 한 달 넘도록 하루 종일 함께 지냈다. 전무후무한 역사적 사건이다. 서로의 아침을 조심히 깨우고 집안을 어슬렁 거리며 살핀다.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연다. 각자 방에서 할 일 하거나 놀다가 아침 8시. 점심 12시. 저녁 6시 밥때가 되면 식탁으로 모였다.


특별히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딱히 함께 한 이벤트도  없고 그 흔한 외식도 딱 한 번 했다.
그저 '집'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자고 먹고 마셨다.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거나 이벤트를 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서로의 독립된 공간과 시간을 존중하며 따로 또 같이 지내왔던 시간들이었다.


남편은 콘퍼런스 콜로 안방 문 고 회사일을 하고 큰애는 줌으로 미국에 있는 친구와 소그룹 활동을 하고 나는 베란다에서 오랜만에 친구와 폭풍 전화 수다를 떤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스트레스받아가며 줌으로 방학특강 수업하는 둘째 눈치를 보며 남은 셋은 혹시나 방해될까 소곤 거리기도 한다
밥 먹으면서 각자 농구를 보거나 게임 중계나 티브이를 보다가도 불쑥불쑥 혼잣말을 한다. 아는 내용이면 서로 대꾸도 해준다.

이러한 일상이 설렘을 안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수다 떠는 것보다 어쩌면  덜 설레고 지루하며 무관심한 하루하루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매우 루틴 하고 반복적이며 어쩜 지루했을 그 시간을 보내면서도 신기하게 그리움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다시 오기 어려울 시간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밥 먹고 어쩌다 시간이 나면 보드게임을 하거나 뉴스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세 남자들은  NBA 경기와 선수 이야기를 나누거나 불쑥 예전에 함께 겪었던 이야기도 나눈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한 시간 남짓 창곡천 산책을 하고 어쩌다 기다리는 줄이 길지 않으면 찹쌀 꽈배기도 한 봉지 사서 집으로 간다. 두 아들은 편의점 외출로 살짝 쇼핑을 간다. 번갈아 설겆지와 분리수거를 하고 빨래 거리를 갖다두며 자기 방에서 청소기를 민다. 언제든 고개를 들이밀면 서로의 공간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동네 아낙들 빨래터에서 모이듯 냉장고 앞에 서성이며 문을 열고 각종 아이스크림을 뒤적이다 하나 뜯어먹는다.. 주방 옆 다용도실에 여러 종류의 과자도 곶감 빼먹듯 가져가 먹는다.
야심한 밤 끓여먹는 라면은  꿀맛이다. 라면을 먹으며 같이 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본다.

매끼 무얼 먹을까 고민하고, 빨래를 돌리고, 삼식이 식구들이 집에 있어 외출도 길게 하기 꺼려지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시간들이 참 소중했다.

일주일 모임과 외출의 풀가동으로 스케줄이 빡빡해야 사는 것 같고 애들이 한참 어릴 땐 하다못해 근처 박물관이래도 다녀와야 보람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항상 누군가와 약속이 있어야 사는 것 같고 쇼핑을 가서 새로운  물건을 보거나 드라이브를 하거나 맛집을 찾아가거나 뭔가 이벤트가 있어야 시간을 잘 보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대문 열고 고개 내밀면 온통 공원과 집 밖에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미국에서의 삶 때문에 내 관점이 바뀌었다. 딱히 특별하지 않아도 뭔가를 하지 않아도 하루는 충분히 의미 있고 살 만하며 또 빨리 지나간다.

넷 중 한 명이 떠났다.
밥공기, 국공기 새로 산 예쁜 커트러리에 누들 볼도 모두 네 개인데 이젠  세 개만 놓아도 된다.

일상..
예전에 처음 뉴욕 맨해튼을 갔을 때 높은 빌딩들이며 엠파이어 빌딩. 타임스퀘어 광장에 자유의 여신상, 센트크 자전거도 타고 각종 박물관을 돌아다녀지만 메트로폴리탄 앞 계단에 앉아 쉬며 프레첼 하나 뜯으며 친구와 쉬던 어느 오후가 나에겐 더 오래 기억이 남는다.

그냥 특별한 것 없이 살다 보니 살아졌던 것, 애써 뭔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것.. 그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있는 것.. 그 일상이 참 소중하고 행복했던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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