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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15. 2015

온몸으로 히틀러에 저항한 본회퍼

히틀러는 훌륭한 리더는 아니지만, 선동가로서는 성공하였다.

적이라고 생각되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그는 세 치 짧은 혀로 독일을 현혹하여 참혹한 전쟁터로 끌고 갔다.

히틀러의 어리석음을 꿰뚫어 보아야 할 종교지도자들마저도 히틀러의 체제 하에서 시녀 노릇을 하였다.

그 중에는 본회퍼의 스승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나치체제가 출범할 때부터 그들의 허구성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본회퍼는 1927년 21살 나이에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비밀리에 히틀러 반대 운동을 하였다.

1937년 나치는 그가 교장으로 있던 핑켈발데 신학교를 폐쇄하였다.

점차 신변의 위험이 다가올 때 미국의 친구 폴 레만은 유혹적 제안을 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머물면서 강의와 연구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본회퍼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 자기가 잘못 왔음을 깨닫는다.

핑켈발데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그때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유니언 신학교의 학장인 코핀 박사의 집 정원에 앉아서 나의 상황과 민족의 상황을 생각하고 기도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해졌다. 미국에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우리 민족이 수난당하고 있는 이때 나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만일 이 때에 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잠시 삼천포로 빠지지만,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 미국은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던 인물을 중심으로 독일을 재건하게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이 잘못했던 것을 뼈저리게 반성, 또 반성하였다. 그것이 전후 독일을 새롭게 하는 기틀이 되었다.

반면에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국은 전쟁 책임자들에게 일본을 재건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지난날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뉘우친다는 것은 곧 자기들의 존재기반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일본은 아직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

더욱 불행한 일은 한국의 경우다.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나라를 재건한 것이 아니라 일본 식민주의에 순응하던 친일파들을 통하여 나라를 재건하게 한 것이다. 미 군정의 가장 큰 과오중 하나다. 민족정기는 여기서 그 맥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독일의 식민지가 된 프랑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은 페탱(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1856~1951)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괴뢰정부를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페탱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4년간 점령군 독일에 협력했던 자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무려 7,037명을 사형시켰다. 에어 프랑스는 민간기업이었으나 나치에 협력하였다는 죄목으로 국영화되었고, 르노 자동차는 독일군에게 무기를 만들어 제공했다는 죄명으로 루이노 회장은 감옥에서 옥사했다. 공직 추방이나 공민권 박탈자의 수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그럴 일이 없겠지만, 프랑스가 다시 독일에 점령되는 일이 있다면, 누가 독일에 협력할 것인가?

한국이 일본에 점령되는 일이 있다면, 누가 일본에 협력할 것인가?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운동에 가담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목사인 그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암살운동에 가담한 것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목사로서 나는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의 손에서 핸들을 빼앗아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언제나 진실한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가 고민하였다.

단지 종교인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온 몸과 마음을 바쳐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언제나 최선의 윤리적 결단을 하고자 힘썼으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도 감당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빌 일이 있으면, 기꺼이 무릎 꿇어 용서를 구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시온교회 교인들과 함께

그는 체포되어 테겔에 있는 군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구치소에 있는 동안 많은 시간을 독서와 편지를 쓰며 지냈다.

자기 부모, 약혼녀, 그리고 절친한 친구 베트게(Eberhard Bethge)에게 보냈다.

본회퍼는 사람들이 자기의 사적인 편지를 읽을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베트게는 자기가 받은 편지 속에 담긴 본회퍼의 통찰을 나누고 싶어 “옥중 서간”이란 제목으로 출판했다.

본회퍼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편지는 조금도 우울하거나 애처롭지 않았다.

본회퍼는 인간의 나약성이나 절망에 호소하는 기독교를 반대했다.

비록 죽음을 앞에 두고 있지만, 그의 편지는 언제나 경쾌하고 생명력이 넘쳐났다.

에버하르트 베트게게 (1909~2000)

영국군 장교이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본회퍼와 함께 수감되었던 페인 베스트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는 쾌활하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대단히 겸손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늘 자기를 유쾌하게 알리고, 삶의 가장 하찮은 현상에도 기뻐하며,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이제껏 만난 몇 안 되는 사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늘 곁에 계신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디트리히 본회퍼 / 에버하르트 지음 / 복있는 사람 / 264쪽)

"그는 감옥 안에서 많은 여러 사람을 만났다.

결코 종교적이지 않은 다수의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 더러는 공산주의자였고, 더러는 세속적 지성인이었고, 또 더러는 단순히 게슈타포의 비위를 건드려서 잡혀 온 보통 사람들이었다.

더러는 종교를 부정했고, 더러는 종교에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본회퍼가 목격한 것은 그 극심한 연합군의 폭격 속에서도,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고도, 그들이 ‘종교의 위안’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예수, 하버드에 오다 / 하비 콕스 지음 / 오강남 옮김 / 문예출판사 / 406쪽)

그는 세속 사회 속에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나 고민하였다.

이제 종교의 시대는 지나갔다.

모두 각자 자기 나름의 주체적 판단과 결정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욱 세속 사회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온몸을 드렸듯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온몸을 드려야 한다.

그것은 곧 이웃을 위한 삶이다.

본회퍼 가족 사진

1944년 9월 22일 히틀러 전복 음모에 관련된 명단이 발견되었다.

본회퍼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

1945년 4월 9일 본회퍼는 교수형을 받았다.

몇 시간만 지나면 미국 군대가 그 감옥을 점령하여 그를 풀어줄 터인데 그 짧은 시간의 엇갈림 속에서 본회퍼는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그가 동료 죄수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하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본회퍼 생가

본회퍼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믿었다.

하나님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다.

그는 죽음 이후의 삶을 믿었기에 현재적 삶에서 더욱 용감할 수 있었다.


본회퍼의 또 다른 이야기들

7.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6. 두려움 앞에서 떠는 본회퍼

5. 레비나스와 본회퍼

4. 니체, 히틀러, 본회퍼

3. 온 몸으로 히틀러에 저항한 본회퍼

2. 맹자와 본회퍼의 고민

1. 다윗과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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