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양혜왕에게 물었다.
“몽둥이와 칼로서 사람을 죽이는 데 다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맹자가 다시 또 물었다.
“칼과 정치로 사람을 죽이는 데 다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왕들이 자기 영토를 넓히기 위하여, 그리고 자기 곡간을 채우기 위하여 백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전쟁터에 끌고 나갔다.
산과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 전쟁터에서 죽은 시체들로 가득 넘쳐 나고 있었다.
명분은 부강한 나라를 위하여 전쟁한다지만, 사실 고통받는 것은 백성이요, 부강한 것은 권세 잡은 자들뿐이었다.
맹자는 양혜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의) 부엌에는 기름진 고기가 있고, (왕의)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는 자들이 있으면
이것은 (왕의) 짐승들을 살찌우기 위하여 백성들을 잡아먹는 꼴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曰, “庖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히틀러에 저항운동을 하다 순교한 본회퍼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그분의 인자하심이라 여긴다면, 그 재물을 형제에 대한 책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돈과 재물로 나를 축복하셨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 자신과 선하신 하나님만 존재하는 듯한 자세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산다면, 그가 행복이라는 우상과 자신의 이기심을 경배하며 살았음을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축복이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아니라, 책임입니다.”(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말할 수 있을까? /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 정현숙 엮음 / 좋은 씨앗 / 12쪽)
기독교인들은 식사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런데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주위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풍성한 식탁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우리를 보고 무어라 말할까?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집 문턱에서 죽어 나갈 때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체 했던 부자를 주님은 결코 좋게 평가하지 않으셨다.
종교는 인간을 행복하고 조화롭게 살며, 고요하고 만족스럽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명상하며 영성을 수련하는 서양인들이 날마다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의 많은 고통과 갈등을 애써 외면하고자 함이라면 그건 결코 영성이 아니다.
1966년 휘튼 대회에서 발표한 '휘튼 선언서'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죄를 지었다.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비성경적으로 격리한 죄다. 우리는 너무 자주 세상의 관심사를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는다."
예수는 "눈 있는 자는 보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강조하여 말한다.
관습에 젖어있는 안이한 태도를 버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라는 뜻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회적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참여적이고 사회적이다.
진실한 종교라면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힘들지만 어렵지만 고민하고 나름대로 해결해 보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종교는 평안보다는 갈등과 고민을 던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5. 레비나스와 본회퍼
4. 니체, 히틀러, 본회퍼
2. 맹자와 본회퍼의 고민
1. 다윗과 본회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