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 이야기 1
어느 책을 읽든지 독자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텍스트가 말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작가가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을 때 그 희곡의 무대장치와 배경도 상상하고, 등장인물의 심리도 생각하며 읽을 때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물론 독자는 셰익스피어의 글을 재해석하여 새롭게 의미 부여를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독서는 재창조의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책 한 권 읽었다로 끝난다면 자랑거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것을 통하여 얻어낸 유익은 너무나 미미할 뿐이다.
성경을 읽을 때도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수천 년 전 고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수많은 학자가 연구한 배경 지식과 고고학적 발굴이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 빈 곳은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을 하게 하므로 오히려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
나는 성경을 읽어가면서 가능한 참고 도서들을 모두 섭렵하여 읽으며 원 텍스트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곳곳에 있는 빈 곳을 발견하면, 오히려 그곳에서 누리는 여유로움과 새로움을 발견하고 성경 읽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성경은 무한한 보물창고와도 같다. 물론 객관적인 증거자료와 연구가 나온다면, 본인이 해석했던 것들을 얼마든지 수정할 겸허한 마음도 필요하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에는 더없이 좋은 부분이다. 오늘은 기드온과 함께 고대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기드온이 살았던 시대 가장 골칫덩어리는 미디안 족속이다.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가 낳은 아들로서 요단 강 동편 쪽에 사는 유목민족이다. 모세가 광야로 도망쳤을 때 미디안 족속에게 피난 가서 거기서 결혼하여 살았다. 미디안 족속은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인족이었다. 그들은 유목생활을 하거나 사막에서 낙타를 이용한 상거래를 하는 대상이었다. 낙타를 이용하여 먼 거리를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은 분명 요단 강 동편 남북 쪽으로 길게 뻗은 왕의 대로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 길은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오가는 중요한 교역로였다. 이 시기의 역사적 상황이 어떠한지 성경이 자세히 묘사하지 않기에 여기에서 우리는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왕의 대로가 어떤 정치 집단에 의해 막혔는지 모르지만, 미디안 족속이 상거래를 하기보다 요단 강을 건너 이스라엘을 무차별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렇다 할 성이 없어 그저 들판에서 반유목, 반 농경 생활을 하였기에 피할 데가 별로 없었다. 그들은 가파른 산기슭에 있는 수많은 동굴 속에 숨는 것이 최선이었다. 미디안 족속은 교묘하게도 추수가 끝난 다음에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확기가 시작될 때쯤 공격하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힘들게 수확하고 나면,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더 강해지는 법이다. 미디안 족속은 추수 후가 아닌 추수 전에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한 해 동안 땀 흘려 농사지은 것을 아예 터 잡고 앉아 자신들이 직접 추수해 가져갔다. 더욱이 조금이라도 남는 것이 있으면, 낙타를 동원하여 잘근잘근 밟아 버려 이스라엘이 아예 재기할 꿈을 꾸지 못하도록 모두 파괴해버렸다. 그러니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상상할 수 있다.
이때 기드온이 타작하는 모습이 성경에 등장한다. 보통 밀을 타작할 때는 넓은 공터에서 바람을 이용하여 겨를 날려 보낸다. 네팔의 시골 마을을 방문했을 때 타작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마당에 곡식을 잔뜩 쌓아놓은 후 가운데 말뚝을 박고, 거기에 소를 묶어서 빙글빙글 돌게 하였다. 황소는 원을 그리며 돌면서 곡식을 밟아 자연스럽게 타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대 이스라엘도 타작하는 방법이 비슷하였다. 곡식 다발을 마당에 깔고 그것을 밟고 다니도록 한 다음 도리깨를 이용하여 두드려 타작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미디안의 공격이 있은 후 그렇게 공개적으로 타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였다. 당시 포도주 틀은 보통 바위에 깊이가 다른 구덩이를 이어 파서 한쪽에 포도를 놓고 으깨면 그 즙이 다른 쪽에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 큰 포도주 틀은 그 안에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크다. 포도주를 만드는 곳은 먼지나 불순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건물 안에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였다는 것은 다른 사람(특별히 미디안 족속)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함이 첫 번째 목적이고, 두 번째 포도주 틀의 기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그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한다는 것은 미디안 족속을 두려워함을 뜻하기도 한다.
숨어서 숨죽이며 밀을 타작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그를 부른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히브리어는 어순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 원문은 큰 용사가 문장의 제일 뒤에 나온다. 그러니까 이 본문의 정확한 구조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큰 용사여.”이다. 그러나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만일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면, 지금 미디안 족속을 피해 여기서 타작할 이유가 없고,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받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기드온은 이렇게 말한다.
'내 주여,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어째서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여호와께서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었는데 지금 그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버려 미디안 사람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그의 말 속에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기드온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내가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문제, 밤마다 눈물 흘리며 괴로워 하는 문제를 풀어주셔야 하지 않는가? 전에 조상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이집트에서 인도하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나에게도 기적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는가?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내가 잘 살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는 어떤 윤리도 자리하지 않는다. 무조건 나를 위하는 신이어야 하고, 나를 복되게 하고, 나를 잘살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고등종교와 미신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신은 윤리가 없다. 그저 자기 하나 잘 먹고 잘살면 그것이 최고다. 그들이 엎드려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도하는 내용은 딱 한 가지, 이기적인 욕심을 이루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등 종교에는 반드시 윤리가 있다. 고등 종교는 사회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윤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고등 종교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람, 그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 그러므로 고등종교는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요소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가르쳐 지키게 한다. 지금 기드온이 말하는 것 속에 윤리는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윤리가 있을까? 그저 자기 한 몸(자기 가족, 자기 교회)만 잘 먹고 잘살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기드온의 불평과 원망 속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하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말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분명 기드온이 말하는 것과 문자적으로 같은 말인데. 나는 여기서 기드온과 여호와의 사자는 같은 말을 했지만, 서로가 의미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신다면, 모든 일이 잘되고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가 큰 용사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겁먹고 소심하여 숨죽이며 세상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당하고 용기 있게 세상 앞으로 나아가는 용사가 된다는 뜻이다. 먹고 살기 위하여 아귀다툼하는 미디안이나 이스라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곁에 함께 하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너 자신을 보고, 인생을 바라보면 너는 큰 용사다. 꼭 싸움에 이기고,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적을 무찌르고, 그래서 잘 먹고 잘살면 그다음에 어떻게 할 건데. 사람이 흔히 말하듯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 3일 앓고 사망하는 것)가 인생의 목표라면, 결코 큰 용사라 할 수 없다. 그건 세속에 파묻혀 사는 모든 인간이 원하는 바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시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윤리가 달라야 한다. 세속의 것, 먹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초월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기드온을 살펴보면서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 볼 수 있기를 원한다.
2. 소심한 기드온
1. 성경은 왜 사람들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