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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05. 2016

로뎀이냐? 에셀이냐?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한 여자에게 정신을 빼앗겨 일을 그르친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를 비판하기 위하여 파스칼이 한 말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스라엘 아합 왕이 이세벨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갈멜 산 수도원

보통 아합하면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한다. 아마 죽은 아합이 그 소리를 들으면, 억울하다고 호소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신하들에게 인자한 왕이란 소리를 들었고(왕상20:31-34)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충언에 귀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가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합력하여 아람 군대와 싸우려고 할 때도 선지자 미가야의 조언을 들었다. 비록 선지자의 말을 따르지 않았지만, 만일 그가 바알 광신도였다면, 결단코 하나님의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았고, 충고를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하시야와 여호람(요람)이라 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여호와께서 붙드시다.”는 뜻이고 요람은 “여호와는 높으시다.”는 뜻이다. 바알을 극렬히 따르는 부인 이세벨이 낳은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것은 정말 의외다. 추측건대 아합은 이세벨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이름을 붙여준 것으로 생각된다. 

갈멜산 수도원

비록 그가 아내 이세벨의 충동에 못 이겨 바알을 따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아합은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을 둘 다 용인하는 종교 혼합주의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이세벨의 고향인 베니게의 도움이 필요하였기에 취한 정책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솔로몬을 따라 종교 관용 정책을 취하였다. 아무튼, 아합의 이러한 종교 관용 정책에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사람이 바로 엘리야다. 

갈멜산 수도원

엘리야는 디셉사람으로 털이 많고 몸에는 모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거나 다정다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광야의 냄새를 풍기는 별난 사람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조용히 하나님만 찾는 수도자가 아니라 과감히 정치 현실에 뛰어들어 도전장을 내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뭄을 선포하고 3년 만에 나타나 아합과 바알 선지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갈멜 산 아래는 넓은 이스르엘 평야가 있다(사진 : 임한중 선교사)

결전의 날에 사람들은 갈멜 산 위에 모였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분명히 엘리야가 이세벨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에게 도전하였는데 결전의 현장인 갈멜 산에는 바알 선지자 450명만 있었고 아세라 선지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주일학교 때 배운바로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웠다고 되어 있는데, 열왕기상 18장 이야기를 읽어보면 아세라 선지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바알 선지자들만 등장한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추측건대 이세벨이 강력하게 그 결전을 반대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세벨이 갈멜 산에 안 올 이유가 없고 그녀를 따르는 아세라 선지자들이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세벨

갈멜 산의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백성에게 풍요를 주시고, 비를 주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임을 확인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내에서 모두 죽였다. 엘리야는 이 영적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이세벨은 더욱 기세가 등등하여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다. 

로뎀 나무

큰 승리 뒤에 오는 허탈감과 실망감에 사로잡힌 엘리야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쳤다. 이스라엘 제일 남쪽 광야가 시작하는 브엘세바의 한 로뎀 나무 아래서 그는 죽기를 간구하였다. (열왕기상 19:4) 죽기를 간구했던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다시 회복하였다. 여기서 우리 한국 교인들의 오해가 생겨났다. 그것은 로뎀이 가지는 이미지에 대한 오해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엘리야가 회복하였기에 로뎀이라는 나무를 매우 좋게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카페나 기도원이나 심지어 미용실에도 로뎀이라는 상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로뎀을 좋은 나무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내 아이디를 로뎀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로뎀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로뎀 나무

로뎀은 광야나 사막 등지에서 쉽게 발견하는 관목으로 일종의 싸리나무다. 이 나무는 화력이 좋아서 연료로 사용하기에 적절하다. 시편 저자는 로뎀 나무 숯불을 언급하였다.(시120:4) 이사야 14:23에 “멸망의 빗자루로 청소하리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원어로 “멸망의 로뎀나무”라는 뜻이다. 즉 싸리나무인 로뎀으로 빗자루를 만들어 불의한 자들을 철저히 멸하신다는 뜻으로 로뎀은 하나님의 불붙는 진노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로뎀은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광야에 1m~1.5m 정도로 자라는 싸리나무인 로뎀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지도 못하기에 아무도 그 나무 아래서 쉬려고 하지 않는다. 엘리야처럼 죽기를 간구할 때 하나님께 항의하는 표시로 로뎀나무 아래에 들어가는 것이다. 로뎀은 자신의 상황이 지금 얼마나 처참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나무다. 

에셀 나무

정말 쉼을 얻고 힘을 얻기를 원한다면, 로뎀 나무가 아니라 에셀 나무 아래에 가야 한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21:33)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왜 에셀나무를 심었을까? 에셀은 땅밑 30m까지 뿌리를 내려 지하수를 흡수할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나무다. 그러므로 물이 부족한 광야나 사막에 심기에 딱 좋은 나무다. 이 나무는 좋은 그늘을 제공하고 잎이 짠 성분을 가지고 있어서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하여 새벽에 이슬을 맺는다. 에셀나무에 맺힌 이슬이 서서히 증발하면서 주변보다 10도 정도 온도가 내려가기에 광야같이 덮고 지치기 쉬운 곳에서 에셀나무의 그늘은 참된 안식처가 된다. 

광야의 에셀나무

그러므로 로뎀은 죽음과 절망을 상징하는 나무라면, 에셀은 쉼과 안식을 상징하는 나무다. 나는 이제부터 나의 아이디를 로뎀에서 에셀로 바꿔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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