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세상천지에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이렇게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되어 오산리 기도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소나무 뿌리라도 잡고 간절히 기도하려고 간 것은 아니다.
누구하고도 마음 털어놓을 사람이 없기에 간 것뿐이다.
기도 굴에 들어가 머리를 숙여 보았지만,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하릴없이 산책하며 기도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 열렬히 찬양하는 사람 모두 너무나 부러워 보였다.
치열하다.
뜨거웠다.
나는 그들 곁에 가까이 가는 게 두려웠다.
한적한 곳을 찾아 헤매다 기도원 외딴곳에 마련된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름 모를 묘지 옆에 가만히 앉았다.
고요하였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꽃잎만 흩날렸다.
문득 두보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꽃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이 줄거늘
수많은 꽃잎이 흩날리니 슬픔을 어이 견디리.”
슬픔 많은 사연을 가득 담고 세월은 또 이렇게 흘러가겠지.
유대인들은 가족이나 친척이 죽으면 애도의 기간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일주일 애도 기간을 가지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한 달 동안 애도 기간을 가진다.
처음 3일은 애곡하는 날이다.
눈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억지로라도 곡을 하며 울어야 한다.
가식 같아 보이지만, 그렇게 억지로 울다 보면 떠나보내야 할 사람과 얽히고설킨 모든 관계가 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일주일간은 씻지도 않고 얼굴에 기름도 바르지 않고, 신도 신지 않고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애도만 하였다.
떠나 보내라는 것이다.
마음에 품고 있으면, 마침내 마음의 병이 될 것이기에 떠나 보내라는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 떠나게 되겠지
그리고 곧 잊혀지겠지.
‘또오해영’이란 드라마에서 박도경의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다.
“사라지는 거 인정하면 엄한데 힘주고 살지 않아!”
요즘 우리는 정말 엄한데 힘주고 살 때가 너무 많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덤벼들지 않아도 될 터인데,
목에 핏줄 세우다 혈압으로 쓰러질 텐데
그러면 그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을 텐데.
‘상실수업’을 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런 충고를 하였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세요.
그들은 당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줄 거에요
그것은 쉽게 놓쳐버리기 쉬운 것들이지요.”
떠나가면서 ‘나는 끝까지 치열하게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도 의미있겠지만,
떠나가면서 남겨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마음을 나누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폐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남의 마음이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 바라봐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다.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기 싫고 나의 이야기만 들어달라고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고 정서적인 유대감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폐증을 앓는 현대인들은 결국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드신 어머니가 옆에 앉는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는가 보다.
그런데 왜 나의 온몸이 이리도 굳어질까?
무슨 핑계로 빠져나갈까?
아니 오늘은 잠시라도 마음 문 열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어야지.
이제 얼마 사실지 모를 어머니! 가슴으로 꼭 안아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