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흔히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나도 자주 말하였다. 현실 교회의 부패함과 타락을 보면서 더욱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성령이 임하고 성령님과 더불어 큰 역사를 이루었던 초대교회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비록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가보고 싶은 곳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면 이러지는 않겠지 하는 기대감 때문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런데 과연 초대교회로 돌아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 초대교회는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이상적인 교회였을까?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초대교회에도 문제가 많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이려고 하였고,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를 구제하는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고린도 교회에는 오늘날과 같은 음란의 문제로 바울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초대교회는 결코 교회의 이상향이라 말할 수 없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칫 기독교 2,000년 역사를 모두 부정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온전하지도 않고 완전히 거룩하지도 않음을 잘 알면서도 그들에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셨다. 때로 성령님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부흥하는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때로 성령님을 외면한 채 제 마음대로 교회를 이끌다 부패하고 타락할 때도 있었다. 그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교회를 지금까지 이끌어오셨다. 기독교는 갈팡질팡하면서도 역사를 만들어왔다. 기독교 성장의 역사 속에 함께하신 성령님을 모두 부인할 생각이 아니라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이런 말을 하였다. “참된 성경적 설교자는 역사 교수처럼 과거의 사건들을 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덕 교사나 철학자처럼 과거의 삶에서 덕을 세우는 교훈을 끌어오는 데 그치지도 않는다. 성령의 영감 된 말씀 안에서 과거의 사건은 다시금 발생하고 있다.” * 역사 교수는 역사적 사실을 파헤치는 데 주력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그들은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고 성장하였을까? 그런 사실 연구도 때로 필요할지 모른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대교회에서 교훈과 모범적 사례를 찾아낸다면, 그 또한 훌륭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설교자는 성령의 영감 된 말씀 안에서 과거의 사건을 현재 이 시대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사람이다. 성령님과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재현되지 않는다면, 사도행전을 백 번 천 번 읽고 연구하고 해석한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 성경 지식은 좀 얻을지 모르지만, 혹 교훈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단회적이냐 반복적이냐? 신학적으로 논쟁이 많은 줄 안다. 내 좁은 생각으로는 그게 다 말장난같다. 오늘 이 시대 대한민국 교회에 성령강림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학적으로 논쟁하고 논리적 결론을 내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성경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우리가 사도행전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단지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초대교회의 상태가 궁금해서 그때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기 위함도 아니다.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였던 초대교회 이름없는 성도들이 이 시대에도 나타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 중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참 많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
바울의 동역자 우르바노와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바울의 친척 헤로디온과 루포와 그의 어머니,
바울의 대필자 더디오와 에디오피아의 내시
빌립보의 간수와 로마 감옥의 군사들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브루고르, 니가노르 등 일곱 집사
바울의 설교를 졸며 듣다 떨어진 유두고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
사도는 아니었지만, 이름도 밝힐 수 없지만, 사도행전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한다.
제자들, 형제들, 신자들, 증인들, 그 도를 믿는 자들
70명의 전도대, 120문도, 500여 형제들
집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지만, 모두가 한결같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안디옥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ος, Christian)은 신조어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사용하던 크레스찬(χρηστιανος, Chrestian, 착한 사람)을 이용한 말 장난(wordplay)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조롱은 안디옥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술 파티에서 그리스도인을 조롱하였다. "저렇게 착해 빠져서 어떻게 살아! 바보들 아니야?” 안디옥의 불신자들이 볼 때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은 이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현실 사회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사회 부적응자들이었다. 실제로 안디옥의 제자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조롱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이 비웃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기로 하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괜찮았다. 착하고 순해 빠져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까 염려하는 마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 하여도 기꺼이 감수하였다. 인생을 사는 길이 꼭 세상에서 남을 밟고 짓이겨 승리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길이고 평화롭고 복된 삶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행28:31)
생각만큼 전도가 되지 않아도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환란과 핍박이 심하여도 자신들이 믿고 있는 도를 버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될 때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깔깔대고 웃어도 그들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죽음도, 고난도, 아픔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더디게 흘러갔다.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에 가공할 역병이 로마 제국 전역을 강타하였다. 역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의학자들은 그것이 서구 최초로 출현한 천연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역병은 15년 동안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었다. 제국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역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로마 인구가 6천만이었으니 죽은 사람은 천오백만 명에서 2천만 명이었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180년 비엔나에서 역병으로 사망하였다.
251년 다시 또 역병이 돌았다. 이번에는 홍역인 것 같다. 역병의 파급력은 천연두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 치료법도 없었고, 위생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3, 4명 중에 한 명꼴로 죽어가는데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집안에 아픈 자들이 발생하면, 아직 죽기 전이었는데 그들은 가족을 거리에 내다 버렸다. 매장하지 않은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멀리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공포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부르짖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도시 한복판에서 그들은 물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아무리 외쳐도 그들이 믿는 신은 답이 없었다.
죽음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고 있는 그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의연하였다. 그들이라고 천연두나 홍역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 신앙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정말 멍청할 정도로 착한 크레스찬(Chrestian)이었다. 두 번째 역병이 돌았을 때 키프리안의 주교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당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썼다.
“우리 기독교인 형제들은 대부분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며 한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옮자 그 아픔을 자신에게로 끌어와 기꺼이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를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 … 우리 형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중에는 크게 칭찬받는 장로와 집사와 평신도들이 있었고 큰 경건과 강건한 믿음의 결실인 이런 죽음은 어느 모로 보나 순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
천연두나 홍역에 걸린다고 모두 죽는 것은 아니다. 비록 치료법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여도 음식을 제공하며 간호해 주면 스스로 회복되어 건강해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마을의 환자들은 이런 돌봄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의 환자들은 병 때문에 죽는 것도 있지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굶주려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역병이 그치고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은 모두 크레스찬(Chrestian)의 착한 행실에 감동하였다. 죽은 줄 알았던 자기 아들, 부인, 부모, 가족이 크레스찬(Chrestian)의 사랑으로 회복되었을 때 그들이 무엇을 느꼈을까? 착한 행실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 믿음을 알고 싶어 하였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기 신들보다 그리스도인이 섬기는 하나님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하고 가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서운 역병은 기독교 부흥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역병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는 크레스챤(Chrestian) 때문이었다.
전에 비웃고 조롱하던 크레스찬(Chrestian)은 이제 진정 존경과 사랑을 담아 부르는 크리스천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일까? 성령에 사로잡혀 기도원 나무뿌리 잡고 흔들어 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일까? 물론 그런 사람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진정 크레스챤(Chrestian)의 삶을 살기만 한다면, 그런 사람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말로만 혀로만 성령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혀 크레스챤(Chrestian)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존 낙스의 고백처럼 오늘 이 시대 초대교회의 역사가 다시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註)
* 사도행전 설교의 과제 / 드와이트 스티븐슨 씀 / 그말씀 1996년 2월호 / 두란노 / 108쪽
** 기독교의 발흥 / 로드니 스타크 지음 / 손현선 옮김 / 좋은 씨앗 / 2016년 / 115쪽
*** 위의 책 / 129쪽
1. 초기 기독교의 발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