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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23. 2016

아브라함을 왜 택하셨을까?

아브라함은 왜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까? 성경의 답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각해보았다. 지금 모든 것이 형통하고 평안한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떠나라고 하면 쉽게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믿음이 엄청 강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풍요와 부요를 누리며 남부럽지 않은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혹시 아브라함은 솔로몬처럼 모든 것을 다 누려보았는데 헛되고 헛된 것이 인생임을 느끼지 않았을까? 수메르 대제국의 겉모습에 속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허무한 삶을 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할 때 기꺼이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창 12장 1절에 보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하셨다. 우리 말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는 대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너는 너가 살고 있는 땅을 떠나 ...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셨다. 히브리 성경은 땅에 대한 대조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보여 줄 땅은 어떤 땅일까? 어떤 사람은 가나안 땅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바로 그 땅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공간적인 의미에서 가나안 땅을 말한다면 가나안 땅은 형편없는 땅이다.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갈대아 우르는 거대한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면서 아주 비옥한 농경지를 만들고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살기 좋은 곳이요, 거대한 대제국을 만들기에 딱 좋은 곳이다. 반면에 가나안 땅은 흔히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가보면 그곳이 얼마나 황무한 땅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곳은 험준한 산악지대와 메마른 광야와 사막이 대부분인 땅이며 더군다나 가나안 땅은 대제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땅이다. 다시 말하면 땅의 가치로만 보면 갈대아 우르가 가나안 땅 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땅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하면서 그 땅을 주겠다고 했을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왜 택하셨는가를 생각해야 문제가 풀어질 수 있다. 창 18:19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과 권속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선택하셨다.


그런데 한글 성경의 의와 공도는 그 뜻을 가늠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KJV에는 Justice and Judgment(정의와 공평한 재판)로 번역하였다. 정의(Justice)는 히브리어로 Tsadaq(체다크)라고 하는데 이 의미가 아주 풍성하고 그 내용이 깊다. 보통 정의(Justice)를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윤리 규범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Tsadaq)는 올바른 관계를 의미하거나 공감을 의미한다. 공감은 나보다 높은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부다. 진정한 공감은 나보다 못한 사람, 소외당하는 사람, 약자들과 하는 것이다.


이사야 42장 3절에는 하나님의 공감능력(정의, Tsadaq)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며 신실하게 정의(Tsadaq)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이 정의를 이루시는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아픔과 눈물과 신음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죄와 사망의 종이 되어 일생 종노릇하며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상을 헤아리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시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여 십자가 은혜를 부여잡을 때 구원의 큰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 되는 역사가 바로 구원의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정의를 실현하시고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신다. 너희도 너희보다 약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함으로써 저들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미가서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내용을 분명히 말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그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신다.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Tsadaq)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욥이 고난 당할 때 친구들이 와서 그를 이런저런 말로 비난하였다. 그때 욥은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운지 말한다.

“나는 의(Tsadaq)를 입었고 의(Tsadaq)가 나를 감쌌다.

내 정의(Tsadaq)는 겉옷과 터번 같았다.

나는 맹인의 눈이었고 저는 자의 발이었다.

나는 가난한 자의 아버지였고 내가 모르는 사람도 변호해 주었다. (욥29:14-16) *

욥은 자신이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정의롭다 하지 않고 약한 자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정의롭다 말한다.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는 약한 자들의 마음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편에 서 주는 것이다. 정의는 한 명 한 명 개인이 실현하는 것이라면 재판(mishpat, 공평)은 시스템을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사회제도에 있는 재판을 통하여 억울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회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나라다.


이렇게 정의와 공평을 실현한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그곳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정말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를 정도로 비옥한 옥토여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이 없고, 약한 자와 소외당한 자들이 위로받고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이상적인 땅, 이상적인 나라를 표현하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는 땅은 바로 그런 땅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를 따라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하여 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아름다운 덕은 곧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와 공평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수메르 제국과 같은 땅에서 살고 있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이 큰소리 떵떵 치는 사회, 무전유죄 유전 무죄가 판을 치는 재판 제도 아래 살고 있다. 허무와 허탄한 세상의 성공을 잡으려고 아등바등하는 보통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수메르 제국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듯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너희는 약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가 세우려는 나라는 공평한 시스템하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이 모두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려고 힘쓰겠느냐?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주(註)

*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 케네스 E 베일리 지음 / 박규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 129쪽


아브라함 이야기

1. 아브라함은 우르를 왜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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