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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31. 2016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아나돗의 밭을 사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나라를 잘 이끌 것이라 기댔던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는 한 여인의 농간에 완전히 농락당하였다. 요즘 온 국민은 집단 우울증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은 있을까? 앞으로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 이런 사람을 지도자로 믿고 따라야 할까?

사람들은 나라를 걱정하면서 촛불을 들고 청계천 광장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내일에 대한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 끈을 잡아보려고 모여들었다. 지도자들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라도 나서봐야겠다는 심정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정말 소망은 있을까? 내일은 잘 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마다 국민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었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정치를 잘할 것처럼 약속하였지만, 임기 말이 되면 언제나 큰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여당도 야당도 정치지도자라고 하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았다. 그래도 이번엔 해도 해도 너무했다. 백성들은 모두 마음에 상처를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지도자라고 하는 대통령은 자기가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이게 우리 현실이다.

희망을 버려라

그래서 고대로부터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희망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여 말했다. 희망이란 것이 무엇일까? 희망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에서 출발한다. '오늘보다 내일은 분명 더 좋아질 거야.' 하면서 막연하게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 그래서 오늘의 아픔을 꾹 참고 인내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일이 더 잘되고 더 좋아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래에는 희망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반대로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이 있다. 오히려 더 안될 수도 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때가 너무 많더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공연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걸면서 걱정하고 염려하기보다 아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않으면, 염려도 걱정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현실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차라리 미래를 보기보다 현실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미래에 희망을 두지 말고 현실에 충실하여야 하자. Carpe Diem!

나부터 살고보자.

사실 요즘처럼 정치가 혼란하고, 지도자들이 지도력을 잃어버릴 때면 사람들이 내리는 가장 많은 결정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도자 믿고 살다가 나라도 망하고 나도 망하겠구나. 나라도 살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현실주의자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기 자기 살길을 찾아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어찌 되었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이 된다. 지금 정치판을 보면 한때 최순실 곁에서 호가호위했던 사람들도 이젠 모두 자기 살길을 찾으려고 자신은 최순실을 만난 적도 없다고 발뺌하고 있다. 모두 제 살기에 바쁜 현실주의자들, 이기주의자들만 득실거리는 세상이다. 희망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도 비슷한 현상이 생겼다. 이스라엘은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같은 나라였다. 남쪽에는 이집트, 북쪽에는 아시리아와 바빌론. 두 나라 사이에서 어느 쪽에 붙어야 살 수 있을까? 국제 정세를 잘 읽는 것이 중요하였다. BC721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할 때 남유다는 재빨리 이집트에 기대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국력은 점점 쇠약해지고 북쪽에는 신흥 강국 바빌로니아가 들어서게 되었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여전히 친이집트 정책을 사용하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았다.

느부갓네살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하였다. 단번에 다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바빌론은 세 번에 나누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심심하면 내려와서 이스라엘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성전에 들어와서 난장판을 만들고 성전 집기를 다 빼앗아갔다. 이스라엘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으려는 수작이었다. 너희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조롱하듯이 가지고 노는 바빌론 앞에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권면하였다. 시드기야왕은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고 '내가 항복할 때 항복하더라도 너는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제 누구라도 이스라엘은 멸망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는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손 놓고 있었다. 나라의 앞날은 깜깜하였다. 희망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어두움이었다. 이러한 때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각자도생. 지도자 믿다가 모두가 다 망할 것 뿐이기에 각자 자기 살길을 찾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때 예레미야의 사촌 하나멜이 예레미야를 찾아왔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자기 밭을 사라고 권하였다. 사실 이제 모든 땅이 바빌론에 의하여 짓밟혀지고 빼앗겨질 터인데 그 밭을 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나멜이 일가친척 모두 찾아다니며 '그 밭을 사라.'고 해보았겠지만, 면박만 당하고 돌아왔을 터이다. 그런 그가 예레미야를 찾아온 데는 까닭이 있다. 예레미야는 곧이곧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는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기업 무를 율법을 이야기해도 씨가 먹히지 않았지만, 고지식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율법이라 하면 따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하나멜이야말로 현실에 약삭빠른 자이다. 사촌이 지금 감옥에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 할지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먼저 살고 봐야지. 하나님이 주신 땅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 이제 바빌론에 빼앗기면 모든 것이 허사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현찰이 제일 중요하다.


그의 예측대로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땅을 은 17 세겔을 주고 산다. 아마도 하나멜은 예레미야를 향해 '이 바보!'하고 욕했을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미련한 바보, 그저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그대로 선포하더니 결국 죽는구나!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말씀대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고, 현찰을 챙겨 먼 나라로 도망쳐 조금이라도 더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어떻게서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려고 남을 짓밟고 무시하고 권세를 악용하며 살아도 죽는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고 소망이고 기대고 아무 소용없다. ‘그저 현실에서 잘 사는 것이 최고다.’ 말하지만, 그도 역시 죽는다.


예레미야가 땅을 사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까닭이 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렘32:15)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 이 땅에 다시 사람들이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사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메시지다. 지금 눈앞의 현실은 분명 망하는 현실이요 깜깜한 현실이요 답답한 현실이다. 모든 사람이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그건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니다. 희망이 있다. 내가 보증한다. 내가 말한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삶, 자기 인생, 자기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지도자와 달리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확실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역사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막연히 기대하고 소망하고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비록 모을 수 있는 돈이 17 세겔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기꺼이 다 투자하였다. 그리고 증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다고 해서 지금 당장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는 그저 손 놓고 앉아서 하나님의 희망을 기다리지 않았다.

베냐민 지파의 아나돗에서 예레미야의 서기관이었던 바룩의 실제 인장이 발굴되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한 후 2,000년이 넘게 나라를 회복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슴에 품고 읽었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있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는 패배의 역사고 절망의 역사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외면하다가 결국은 망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절망의 지평선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이제까지 망하는 것이 뭔지를 잘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사는 길로 가보자는 뜻으로 역사를 읽었다. 이제부터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보리라 다짐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남자 10명만 모여도 회당을 만들고 무상으로 자녀교육을 하였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정신 무장을 시켰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에 몰두하여서 우상을 섬기며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그저 현실에 사로잡혀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까 아등바등한다. 남을 밟고서라도 올라서려 하고, 남을 사기 쳐서라도 자기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멜이 사촌 예레미야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오히려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지혜롭다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지 말자. 그렇게 살다 우리 다 망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대로 살아가자. 어리숙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자.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며 살아보자. 내가 손해 보고 내가 바보 소리를 듣더라도 그렇게 살아보자. 삶의 방식을 바꾸어보자.  세상 나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자.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 말씀대로 살았는지는 따지지 않겠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살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뿐이다 . 이것이 예레미야의 교훈이고, 이스라엘 역사의 교훈이고 구약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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