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누가는 자신의 글이 끝나지 않을 것을 사도행전 1장 1절에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누가는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지를 쓸 계획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뿐만 아니라 듣고 수집한 것까지 자세히 기록하고자 하였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하여 교회의 역사를 쓰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인간적인 한계에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십자가와 부활로 끝나지 않음을 확실히하였다.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 천당을 외치는데 누가의 관점에 의하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는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심각한 왜곡이다.
교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큰 사명을 가지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초대 교인은 유명하든 무명이든 어디로 가든지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신약 성경에 이름이 언급된 교회는 모두 열다섯 교회인데 어디 그뿐이겠는가? 바울이 방문한 곳 말고도 다른 모든 제자가 방문한 곳은 어디든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졌다.
1. 유대 공동체
유대인들도 어디를 가든지 공동체를 형성했다. 남자 10명만 있으면 회당을 세웠다. 그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유대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회당예배와 교육에 힘썼다. 그들은 구약 역사를 읽으면서 왜 이스라엘이 지금 이렇게 나라 잃은 설움 속에 떠돌아다니는가 교훈을 찾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배우고 유대인임을 잊지 않기 위하여 반드시 몸에 할례를 행하였다. 자기 몸에 유대인임을 확실하게 새기고 유대 정신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유대공동체는 그 어떤 공동체보다 끈끈하고 사랑과 정이 넘치는 공동체였지만, 매우 폐쇄적이고 자기 민족 중심적인 공동체였다. 유대공동체는 자연히 보수적이고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2. 로마 종교 공동체
로마는 기본적으로 황제 숭배 사상을 따르도록 요구하였다. 황제를 신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종교를 섬기더라도 문제 삼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이시스(Isis)와 세라피스(Serapis)와 키벨레(Cybele) 신을 가장 많이 믿었다. 로마 군인들은 어둠을 이기는 빛의 투사를 뜻하는 미트라스(Mithras)라는 신을 섬겼다. 로마 종교는 혼합주의였다.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하지 않았다. 종교에 대한 애착심이나 자기 종교만 믿어야 한다는 독선도 없었다. 로마 종교는 경쟁적으로 큰 신전을 세우고 엄청난 종교예식(축제)을 거행하였다. 로마의 황제와 귀족들은 마치 대기업이 문화행사에 후원함으로 기업 이미지를 높이듯이 앞다투어 종교예식에 후원하였다. 화려하고 웅장한 종교예식에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로마인들의 90% 이상이 로마 종교를 믿었다.
3. 기독교 공동체
기독교 공동체도 유대 공동체처럼 어디를 가든 교회를 세웠다. 열 명이 모여야 세우는 것이 아니고 두세 사람만 모여도 교회를 세웠다. 기독교 공동체는 할례를 강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머리에 물로 세례를 주었을 뿐이지만 공동체의 끈끈함은 유대공동체 못지않았다.초대 교회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그들은 말씀을 받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종교예식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었다. 가난한 이웃이 있으면 기꺼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콩 하나만 있어도 둘로 나누어 먹었다. 건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좀 큰 집이 있으면 기꺼이 그 집을 모임 장소로 내놓았다. 정 모일 곳이 없으면 들이고 산이고 동굴이고 땅속이고 어디든 문제 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그들의 모임은 열린 공동체였다. 믿는 자들끼리의 사랑 나눔에서 멈추지 않고 불신자들을 향한 사랑도 아낌없이 베풀었다. 전도지를 나누면서 예수 믿으세요 하지 않고, 먼저 사랑과 관심과 돌봄을 베풀고 나서 그 후에야 말씀을 나누었다. 그들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생각했다. 누가 아파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아파하고, 누가 설움 속에 눈물 흘리면 함께 부둥켜 안고 울었다. 도울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훨씬 중요하였다. 인종과 빈부와 학식과 신분과 국적을 다 초월하였다. 그렇게 곳곳마다 신앙공동체가 세워졌다. 그렇게 복음이 전파됐다.
4. 무너지는 공동체
마침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의 황제와 귀족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아무런 결속력이 없던 로마 종교는 힘없이 무너졌다. 90%를 자랑하는 신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엄청나게 큰 신전과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너지는 건 순간이었다.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유대 공동체 역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저 자기들만의 장소에서 자기들만의 종교로 머물렀다.
요즘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혹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폐쇄적이고 보수적이고 편협한 기독교의 모습이 아닌가? 날마다 쪼그라들면서도 아무런 대책 없이 그저 사교 클럽처럼 자기들끼리 좋으면 그만이라고 하지 않는가? 혹시 로마 종교처럼 커다란 신전과 엄청난 헌금과 무수히 많은 신도를 자랑하지만 아무런 결속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에서 경건한 종교예식만 구경하다 흩어진 로마인들처럼 종교생활 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무너지고 쪼그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누가가 쓰고 싶어 하는 사도행전(교회 역사)은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니다. 끈끈한 사랑이 있는 신앙 공동체, 약자들을 돌볼 줄 아는 돌봄이 있는 공동체,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끌어안고 함께 우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면 무너질 것이다. 신앙 공동체는 영원의 세계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를 현재의 시간에 세우고자 노력하는 공동체다. 비록 부족하고 모자란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공동체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하고 흠이 많음을 아시지만, 우리를 제쳐놓고 일하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신다. 이제라도 마음을 일깨워 주님 손을 부여잡고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 열린 공동체 만들기 작업에 들어간다면 소망은 있다.
1. 초기 기독교의 발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