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가 말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듯, 글을 지으려면 뜻을 써야 한다.”
진화생물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생각하길 싫어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들은 최초 인류를 현생인류와 구 인류로 구분한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슬기로운 사람, 즉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수십만 년 동안 사냥을 하며 살던 고대 인류는 식사량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들은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려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 단지 사냥할 때만 생각하였다. 인간의 유전자는 생각 없음이 훨씬 편하고 좋다는 것을 우리의 몸에 각인하였다.
식사량이 늘어나면서 잉여 에너지가 생겨나자 비로소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슬기로운 인간이 등장하였다.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인류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문명의 역사는 불과 일만 년도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살지만, 우리 유전자는 지금도 속삭이고 있다. 생각 없이 사는 게 편하다. 생각하지 마라!
나는 매일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하루를 살면서 무엇을 쓸까? 고민하지만 때로 아무런 생각, 아무런 뜻도 찾을 수 없어 그냥 지나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생각하는 것조차 싫어서 마냥 시간을 흘려보낼 때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만 이내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학자이기 때문도 아니고, 생각이 많아서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 없이 살다가 인생을 마감할 때 후회할 것 같아서 글을 쓴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붙잡아 두지 않으면 바보가 될 것 같아서 글을 쓴다.
이번 주간은 기독교에서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는 고난 주간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천한 몸으로 오셨다.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오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고자 오셨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천대받는 사람을 돌아보며, 병든 자를 위로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며 책망하기보다 자신이 대신 그 짐을 다 짊어지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자신이 대신 다 받으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욕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아우성쳤다. 수제자마저 배반하였다. 3년 동안 사랑을 주고, 먹이고, 가르쳤지만, 그들은 은혜를 잊어버렸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고개를 돌리고 계신 상황에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다.
용서하기 위하여.
사랑하기 위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오신 그 뜻을 잃지 않으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하셨다. 그것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주님은 혹시나 제자들이 용서를 단지 횟수로만 오해할까 봐,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결론을 내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35)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누구를 진심으로 용서한 적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하면, 내가 누구를 용서할 상황보다 내가 무릎 꿇고 회개해야 할 상황이 더 많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다면, 반드시 욕먹을 짓이나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비방을 받았다면, 반드시 비방 받을 짓이나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용서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회개가 더 어울린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도 나도 모두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진심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을 수 있을 땐 바로 그때인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그 마음을 Attitude(삶의 자세)라고 하였다.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당신의 삶의 자세는 어떠한가? 그리고 그 삶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자리에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고난 주간 나는 무겁게 자신을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