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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30. 2017

롯의 선택, 우리의 선택

베드로후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알고 계십니까?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에 갔다가 목자들의 다툼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사람이지요.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죄악의 도성인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부인은 소금기둥이 되었지요.  두 딸과 겨우 도망쳐 동굴 속에서 살다가 딸들과 부정한 짓을 하여 모압과 암몬의 조상인 벤암미를 낳게 되지요. 어찌 보면 참 수치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롯에 대하여 전혀 다른 평가를 하였습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벧후 2:7,8)

베드로 사도는 롯을 의로운 롯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가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 심령이 상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롯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베드로의 평가 중 어느 쪽이 옳을까요? 혹시 우리가 현대인의 도덕 기준과 편견으로 롯을 잘못 평가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베드로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창세기를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롯은 삼촌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그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늘 존경하고 따르던 삼촌이기에 믿고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리고 간 것이 인생 일대 최대 실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척을 떠나라 했는데 그가 조카를 데리고 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이라 평가합니다. 그러나 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땅을 주기로 하였는데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 그 축복을 누려야 할까요? 그렇다면 318명이나 되는 종들도 데려가지 말았어야지요. 천국 길을 가는 여정에 함께 하는 친구들이 많으면 좋을 순 있어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아브라함이 롯을 데려간 사실을 나쁘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가나안에 도착하였지만, 큰 흉년 때문에 애굽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브라함은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속였다가 큰 봉변을 당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과 롯은 애굽에서 엄청난 복을 받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요. 그때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두 사람의 양무리가 많아져 목자들 간에 다툼이 잦아졌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롯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13:9)

아마도 두 사람은 산꼭대기에 올라갔을 줄 압니다. 거기서 롯이 좌우를 살펴보니 동쪽에는 요단 강이 흐르고 좌우로 수풀이 우거져 여호와의 동산 같았습니다. 반면에 서쪽은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었습니다. 선택권을 가졌던 롯은 당연히 동쪽의 기름진 땅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분은 롯이 욕심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여 쫄라당 망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분은 롯과 같은 위치에 있으면 메마르고 황폐한 땅을 선택하였을까요?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우리는 롯이 선택한 땅에 멸망할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롯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람이 멸망할 도시를 일부러 선택하겠습니까? 분명 그곳에 가면 잘 살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선택하였을 뿐입니다.


롯이 떠난 후 아브라함이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암담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을 위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13:14-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땅에 롯이 간 동쪽 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곳도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에서 가장 비옥한 요단 강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선택한 동쪽 땅은 결코 나쁜 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든 고향 땅을 버리고 도시로 옮겨온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롯과 같은 이유때문에 도시로 나왔습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 광야와 도시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도시는 물질의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죄악 된 도시이고, 멸망할 도성입니다. 반면에 광야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살 수밖에 없는 메마른 땅입니다. 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만, 그곳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롯처럼 우리도 도시를 선호합니다. 우리는 롯을 비난할 자격도 없고 어쩌면 롯보다 더 욕심꾸러기인지도 모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사는 롯이 좋았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롯은 그들의 불의하고 불법한 행실을 보고 마음이 상했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에도 롯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19:1)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고 노을은 빨갛게 물드는 데 롯은 성문에 앉았습니다. 어느 쪽을 보고 앉았을까요? 성문 안쪽을 보고 앉았을까요? 아니면 성문 바깥쪽을 보고 앉았을까요? 성문 안쪽에는 죄악으로 물든 불의한 소돔 백성이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단 한 명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었습니다. 롯은 소돔 성 사람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롯은 틀림없이 성문 바깥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먼 산 붉은 노을을 바라보는 롯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와 있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뭐하며 살아왔나?"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살다 보면 가끔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며 때로 후회하고 때로 반성하면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우리도 대도시에 살면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때가 있을까요? 아니면 대도시에 사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해서 여기서 영원토록 살고 싶은 마음인가요? 롯은 화려한 도시에 살았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저녁만 되면 성문에 앉아서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멀리서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천사라는 것을 알지만, 롯은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그 두 사람이 소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소돔 사람처럼 죄악 된 사람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걷는 자세나 모습이 달랐습니다.


가끔 모르는 사람이 저에게 “혹시 목사님이세요?”하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보였어요.”

그러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모르는 사람에게 “혹시 교회 다니세요?” “교회 다니는 사람처럼 보여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롯은 그 두 사람을 자기 집에 모셔서 함께 교제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두 사람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창19:2)

롯은 전에 아브라함과 함께 나누었던 영적인 교제가 너무 그리웠습니다.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졌던 경건한 교제가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그냥 보낼 수없었습니다. 가능하다면 밤새 경건한 교제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험악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언제 잡혀가서 재판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숨죽이며 신앙생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도들의 진실한 교제, 경건한 교제가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마침내 초대교회 교인들은 한가지 암호를 만들었습니다. 물고기(Ictus :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글자) 입니다. 그들은 자기 집에 물고기를 그려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나가다가 그 물고기 표시를 보고 들어와 조용히 물고기를 그립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예 저는 빌립보에서 왔습니다.”

“아 저도 그곳 소문을 들었습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 자매가 바울 선생님을 만나 교회를 세웠다지요.”

“예 그렇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전에 두 사람은 전혀 몰랐던 사이였지만, 물고기 신호 하나로 두 사람은 밤이 맞도록 신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러한 교제를 바탕으로 모든 환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사는 삶에 롯처럼 갈등하고 고민하고 마음 상하시는 적이 있나요? 경건한 신앙인들의 만남이 너무 그리워서 교회로 달려와 위로를 얻고 힘을 얻으시나요? 초대 교회 때도 굳이 성도의 만남이 필요한가? 혼자 성경 보고 신앙 유지하면 되지 않나 하는 가나안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경고를 하였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4-25)

요즘 교회마다 출석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말세인 것은 확실한 듯합니다. 소돔 같은 도시에 살아가면서 마음 상하기는커녕 도리어 잘 적응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성도와의 만남보다 세상 친구와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롯을 비방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듯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롯보다 훨씬 못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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