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May 31. 2017

서서평과 노무현

이틀 동안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서서평과 노무현.  

1912년 한 외국인 여성이 이 땅을 찾아왔다. 그녀는 독일계 미국 간호 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1880-1934)이다. 33살 처녀로 이 땅을 찾아온 서서평은 광주 전남지역에서 사역하였다. 그 당시 광주 인구가 220만 명이었는데 그중 88만 명이 절대 빈곤층이었다. 그녀는 나귀를 타고 전남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았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한 달간 5백 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굶주리고 있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사생아였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12살 나이에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대서양을 건너가는 소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달랑 주소 하나만 가지고 많은 이민자 틈에 끼여 이리저리 밀려다닌 어린 쉐핑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한동안 이민자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쉐핑은 세상이 너무나 낯설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딸이 개신교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외면하였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런 그녀가 조선의 버림받은 여인과 아이들을 보았을 때 마치 자신을 보는 듯 했다. 그녀는 버려진 갓난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수양아들 수양딸로 삼았다. 큰년, 개똥 어멈 등 이름 없는 여성들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며 그들도 사람임을 가르쳤다. 그녀는 부인조력회(여전도회)와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를 창립하였으며 이일학교를 세웠다. 그녀는 고아와 과부, 나병 환자를 먹이고 돌보아 주었다.

22년간 이 땅과 이 백성을 섬기면서 모든 것을 내주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외국인 복장과 습관을 버리지 않고 그들만의 문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서평은 달랐다. 그녀는 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을 졌다. 안식년이 되어 미국을 갈 때도 한복을 입고 갔다. 십수 년 만에 다시 어머니를 찾았지만, 어머니는 어디서 거지가 나타났다고 문전박대하였다.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주고 섬기던 그녀는 스프루(sprue)라는 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스프루는 충수염(appendicitis)의 일종으로 심각한 복통, 장 폐색, 복막염, 변비, 설사를 동반하는 병이다. 그녀는 하늘 문이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호흡만 거두면 시체를 해부하여 연구 자료로 삼으세요.”

그때까지 그녀는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였다. 시신을 해부한 후에야 그녀의 질병이 스프루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영양실조로 쪼그라져 있었다. 조그만 방에 남겨 놓은 것은 남에게 나눠주고 반쪽이 된 담요, 동전 일곱 전, 그리고 강냉이 두 홉뿐이었다. 벽에는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는 글 하나가 적혀 있었다.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서서평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운구는 소복을 백설같이 차려입은 이일학교 여학생들이 했고 행렬 선두 꽃다발은 서평이 사랑하던 학생 오복희가 들었다. 수백을 헤아리는 걸인과 나환자들이 “어머니! 어머니!” 목 놓아 울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조선을 섬길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천천히 평온하게 살기를 소망한 서평은 그렇게 이 땅을 떠났다.

서평의 삶은 치열하였다. 버림받음이 무엇인지 잘 알았던 그녀는 누구보다 버림받은 사람을 사랑하였다. 슬픔이 무엇인지 잘 알았던 그녀는 누구보다 조선 백성의 고통을 슬퍼하였다. 서평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고 했을 때 기대가 컸다. 그녀를 조금 알고 있었기에 감동하고 눈물 흘릴 준비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게 실망하였다. 다큐를 소개하기 위하여 연단에 선 제작자가 졸릴지도 모른다는 말에 불안함이 엄습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큐는 제목 그대로 천천히 평온하게 꿈나라로 인도하였다. 이렇게 감동적인 스토리를 이렇게 졸리게 만들 수 있구나! 처음 5분 내용을 무한 반복하였다. 클라이맥스나 반전도 없고 기승전결도 없었다.


서서평을 본 다음 날 다큐 “노무현입니다.”를 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노무현을 잘 모른다. 5공 청문회 때 전두환 노태우를 속 시원하게 몰아붙였던 국회의원으로는 기억해도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가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는지, 그가 누구를 위해 살았는지 관심이 별로 없었다. 노무현을 찍기는 하였지만, 한때 노무현을 심하게 욕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노무현’이란 이름 석 자는 왠지 모른 아련함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가끔 그의 짤막한 연설문을 유튜브에서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울컥했다. 나는 노무현을 알고 싶었다.


런닝 타임 109분. 은근히 두려웠다. 78분짜리 필름 서서평이 나를 지겹게 하였기에 혹시 노무현마저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기우였다. 함께 영화를 보았던 김 전도사는 "이런 다큐는 6시간 정도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하였다. 부산 출신으로 노무현을 좌익 용공으로 알던 그가 하는 말이었기에 더욱 놀랐다.

영화는 감동적이었다. 가난한 노무현은 중학교 때 학비를 제때 내지 못하였다. 형이 학교를 찾아가 학비를 나누어 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교실에 들어온 담임 선생은 다짜고짜 어린 노무현의 뺨을 때리면서 ‘이런 놈들 때문에 학교가 망한다.’ 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노무현의 가슴에는 가난하여 설움 받는 사람, 못 배워서 고통받는 사람 편에 서기를 소망하였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버림받은 사람을 위해 싸웠다.

만년 꼴찌 후보 노무현, 바보 노무현. 기득권층과 수구 보수 세력과 싸움에서 그는 언제나 패배하였다. 흑색선전, 가짜 뉴스, 찌라시, 지역 갈등 조장, 용공, 빨갱이. 고졸이 뭘 하겠다고 나서느냐는 지식인들의 은근한 비웃음과 조롱. 그러나 노무현은 무릎 꿇지 않았다.

분열에 통합으로 맞서고, 흑색선전에 정직함으로 맞서 싸웠다. 착한 사람이 승리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도와주십시요!!!” 외치는 노무현은 백성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 소리는 곧 가난한 백성, 억울한 백성, 눈물 흘리는 백성의 외침 같았다. "도와주십시요!"

영화를 보면서 노무현에게 미안했다. 나는 노무현이 치열하게 싸울 때 방관자였다. 부끄럽고 미안하여서 눈물이 나왔다.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죠?”

이 땅의 백성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민주 사회가 오겠죠? 설움 받고 외면당하는 사람이 없는 시대가 오겠죠?

“근데 저는 그때 없을 것 같습니다.”


두 개의 다큐를 보고 생각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서서평과 노무현은 비교할 수 없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사람은 불신자다. 한 사람은 선교사고 다른 사람은 정치인이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했고, 다른 사람은 정치적 목표를 이루려 하였다. 한 사람은 사랑과 용서를 기반으로 일했고, 다른 사람은 억눌리는 상황에 대한 분노를 기반으로 일했다. 결코, 비교될 수 없다. 


두 사람은 비교할 수 없지만, 비교 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다큐다. 하나는 이렇게 감동적인 서서평 스토리를 이렇게 지루하게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노무현 다큐는 그 반대다. 정치인이라 하면 정치적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야망이 있다. 정치적 판단에 따라 그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다큐를 보면, 정치적 호불호를 넘어서서 노무현이란 사람에게 빠져들게 된다. 


다큐를 만드는 사람의 실력, 다큐를 구성하고 전개하는 능력,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확연히 달랐다. 하나는 감동과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안이한 태도로 다큐를 만들었다면, 다른 하나는 치열한 싸움을 싸우듯이 만들었다. 마치 오늘날 교회 사역자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였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력 하지 않고 연구도 하지 않고 맨날 하는 소리를 반복하여 교인을 졸게 만드는 게으른 사역자를 보는 듯하였다. 그 점이 다큐를 보고 나온 나의 첫 번째 슬픔이었다. 


두 번째 노무현을 따르는 사람이 솔직히 너무 부러웠다. 노무현이란 사람이 얼마나 흡입력이 있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남자들이 인터뷰 중에 우는 모습은 흔한 경우가 아니다.) 자신을 헌신하였는지 놀랄 뿐이다. 대통령 후보 유세 중 강원도에서 빨간 종이에 노무현을 빨갱이로 묘사하는 벽보를 붙인다는 첩보를 받고 그 밤 그들은 모였다. 벽보를 붙이는 사람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붙이고 떠나면, 밤새 그 벽보를 제거하였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때로 점심도 먹지 못하면서도 온종일 노무현을 외치고 춤추고 뛰어다니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그들이 노무현에게 무엇을 받았길래, 그들이 노무현에게 어떤 감동과 은혜를 받았길래 저리 행동하나? 별거 아니었다. 정직, 진실, 권력보다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들은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다.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서서평은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온몸과 마음을 다 주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선배가 있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받은 것으로 치면 우리가 훨씬 많이 받았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를 따르기보다 권력에 아부하며 기생하고 있지 않은가? 돈에 굴복하고 있지 않는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서서평 같은 위대한 선교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삶을 흉내 내기는커녕 도리어 세상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 친박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목을 놓아 소리를 지를 때 난 감동받지 못했다. 그들 중에 많은 수의 크리스천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를 위해 소리 지르고 예수를 위해 헌신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가 어느 정치인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너무나 희극적으로 보여 헛웃음만 나왔다. 


다큐를 보고 나서 그리스도인 중 그리스도 때문에 눈물 흘리고 감동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에게 헌신하여 서서평처럼 가난한 자를 돌보고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노무현 다큐를 보고 노무현과 아무 상관 없는 나를 울렸듯이,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 때문에 불신자들이 눈물짓는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다. 게으름에 머무르고 편안함만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노사모와 오버랩되면서 나를 두 번째로 슬프게 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박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그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