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내가 검고, 안방 출입 한량들의
능숙한 사교술이 없기 때문이거나
내 나이가 황혼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깊이 들어간 건 아닌데…
그녀는 떠나갔어. 난 속았고 내 위안은
그녀를 증오하는 것이야.”(오셀로 3막 3장)
오셀로는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운 중년의 흑인 장군입니다. 오셀로를 연모하는 데스데모나는 베네치아 공국 원로원의 딸로서 아리따운 아가씨입니다.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오셀로의 남자다움에 반한 데스데모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셀로와 결혼합니다. 일생 전쟁터만 오갔던 오셀로는 다시 변방 수비를 맡아 아름다운 신부 데스데모나와 함께 전쟁터로 떠납니다.
부관자리를 노리고 있던 오셀로의 기수 이아고는 라이벌 카시오가 부관이 되자 복수를 결심합니다. 싸이프러스에 도착한 첫날 술을 좋아하는 카시오에게 일부러 술을 먹여 난동을 부리도록 해서 파면당하게 만듭니다. 그 후 카시오에게 다가가 마음씨 착한 데스데모나에게 복직을 부탁해보겠다고 말합니다. 이아고는 데스데모나와 카시오의 만남을 주선하고, 오셀로가 그 장면을 목격하도록 꾸밉니다.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질투하도록 넌지시 말합니다.
“오 장군님, 질투를 주의하소서.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농락하는 초록 눈(green eyes)의 괴물입니다.”
이아고는 오셀로의 마음에 질투라는 괴물을 넣어주는 데 성공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계기로 해서 현대 영어에서 'green eyes'는 '질투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아고는 누구보다도 오셀로를 위하는 척 하지만 그는 본성이 악한 자입니다. 그는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 결혼 선물로 준 손수건을 훔쳐 카시오 방에 두었습니다. 손수건을 본 오셀로는 질투와 분노로 이성을 잃습니다.
평상시 자신이 과분하게도 아름다운 데스데모나를 얻었다고 생각한 오셀로는 자격지심에 빠져듭니다. 나이도 많고, 흑인이었던 오셀로는 조금씩 판단력을 잃어갑니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놀아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던 오셀로는 괴로움에 소리지릅니다.
“깊이 사랑하지만 의구심이 가시지 않고, 의심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한다.”
그는 의심과 질투에 눈이 멀어 마침내 아내의 목을 졸라 죽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이 드러나고 자신이 잘못 판단하여 데스데모나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도 자살하고 맙니다. 질투는 비극적으로 끝을 맺습니다.
정신과에서는 이를 두고 ‘오셀로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근거 없이 자신의 아내가 성적 배신을 저질렀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남편들이 앓는 정신병입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히면 아내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도 완벽하게 소유하려 하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자신이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 관계를 끝내는 질병입니다.
베란 울프(W. Bean Wolfe, 1900~1935)는 질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질투가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질투는 사랑이라는 나무에 엉겨 붙어 가지를 시들게 하고 뿌리까지 망가뜨리는 담쟁이덩굴과 같다.
질투가 성공하면 사랑의 대상을 노예로 만들어 사랑이 불가능해진다.
질투가 실패로 끝나면 양쪽 모두 치명적 불행을 초래한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인간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존재적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도구적 관계)로 설명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참된 만남입니다. ‘내’가 있음으로써 ‘너’가 기쁘고, ‘너’가 있음으로써 ‘나’는 기쁩니다. ‘너’란 인격은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상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적 관계입니다. 비록 자녀가 부족하고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자녀를 한 인간으로 보고 끝없는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 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끊임없이 믿어주고 사랑합니다.
반대로 ‘나와 그것’의 관계는 차가운 형식적 만남입니다. '그것'은 인격이 아니라 물건입니다. 물건은 소유 가능하며 동시에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버릴 수 있습니다. 도구적 관계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간관계입니다. 오늘날 인간 관계 대부분은 도구적 관계로 전락하였습니다.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든 바꿀 수 있고, 실제로 냉정하게 갈아치웁니다.
도구적 관계에는 계약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계약은 그 사람이 해야 할 역할과 의무가 따릅니다. 만일 계약 조건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언제든 계약은 파기되고 그는 버려집니다. 현대 사회에 사랑과 배려는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입니다. 냉정한 사회에 살아가는 모든 직장인은 일정한 성과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불안감으로 전전긍긍합니다. 마치 커다란 기계의 부속품과 같습니다. 문제는 계약관계뿐만 아니라 연인과 친구와 가족과의 관계도 도구적 관계로 볼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P. Fromm, 1900~1980)은 소유라는 개념으로 이것을 풀어냈습니다. 고대 언어에는 소유를 뜻하는 ‘갖다’(have)라는 동사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회가 분화되고 발전하면서 소유 개념이 생겨나고 말과 어법에도 소유적 표현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대인은 ‘나는 이가 아프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치통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사랑한다’, ‘원한다’, ‘미워한다’와 같은 동사적 표현도 ‘사랑을 가지고 있다’, ‘소망을 가지고 있다’, ‘증오를 가지고 있다’와 같은 소유적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현대인은 사랑, 증오, 아픔과 같은 정신적인 대상까지 마치 물건처럼 소유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너는 내 거야’, ‘너는 내가 찜했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한 인격을 소유물로 간주하여 그를 지배하고 압박하고 구속하는 것이 사랑인 줄 생각합니다.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소유물로 간주하여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정신 병리적 행태입니다. 베란 울프는 질투와 사랑은 단 1%도 공통점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현대에 참사랑은 실종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상대방을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한 인격체로 존중합니다. 사랑은 ‘갖는 사랑’이 아니고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받는 사랑’이 아니고 ‘주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사랑할 줄 안다고 생각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이 세상에 참사랑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에게 사랑을 배우라고 충고합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이야말로 참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영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라 표현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참된 사랑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배우고 또 배워야 할 사랑입니다.
참고도서
1.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서울 : 웅진지식하우스, 2013)
2. W. 베란 울프, '아들러의 격려', 박광순 옮김 (서울 : 생각정거장, 2015)
3. 김형경, '남자를 위하여', (서울 : 창비, 2014)
4. 브렌다 쇼샤나, '남자는 나쁘다', 정지현 옮김 (서울 : 쌤앤파커스, 2013)
5. 김보일, '도구와 소유의 인간관계를 넘어서' (서울 : 월간 논, 2008년 1월호 통권 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