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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27. 2017

사랑하기에 판단을 유보한다!

키에르케고어와 어거스틴

“Once you label me you negate me.” - 키에르케고어

당신이 “넌 그런 사람이야.” 하며 규정하는 순간 당신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전부를 보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한 부분만 보고 평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옛말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누구도 사람의 속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평가하고 판단한다.

어렸을 때부터 듣기 싫었던 말이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어떻게 하나를 보고 열을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셜록 홈스인 것처럼 재빠르게 남을 판단한다. 영화에서 셜록 홈스의 판단은 대부분 맞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다. 실제 삶 속에서 그런 판단력은 있을 수 없다.


나의 부모는 완벽주의자였다. 집 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모든 물건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쓰레기나 먼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끔 물건을 찾기 위해서 외출하신 어머니에게 전화하면, 그건 어디에 있다고 정확히 가르쳐주었다. 불행히도 우리 가족 중에 유독 나만 완벽주의자가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왔다. 양말은 벗어서 아무 데나 던져두었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아주 가끔 정리한다고 해 놓으면 어머니가 들어와서 다시 정돈하며 잔소리를 하였다. 나는 천덕꾸러기였다. 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늘 그런 소리를 듣다 보니 나도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희망을 버렸다.


완벽주의자가 보기에는 늘 부족한 것뿐이고 모자란 것뿐이지만, 세상에 완벽주의자만 사람 구실 하는 것은 아니다. 정리 정돈 잘하고, 청소 잘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반드시 정리 정돈 잘하는 사람이 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벽주의보다 어딘가 조금 허술한 면이 있는 사람이 훨씬 더 포용력이 있고 여유가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처음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 장로에게 ‘도둑놈’이란 소리를 들었다. 사연인즉 교역자 회의 중 부교역자가 중고등부실 마이크가 고장 나서 지난주 사용을 못 했다는 보고를 하였다. 난 별 생각 없이 그러면 빨리 고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세운상가에 나가서 마이크 하나 고쳐오는데 몇 만 원도 들지 않았다. 문제는 그 소식을 들은 장로가 누구 허락을 받고 마이크를 고쳤느냐? 교회 관리 위원장인 자기의 허락을 받지 않고 쓴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노발대발이었다. 처음에는 담임목사 군기를 잡으시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수년 동안 회의를 할 때마다 우리 교회에 도둑놈이 있다. 교회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도둑놈이 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했는데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한다. 늘 훈계조로 말하는 데 그 말은 명백히 나를 향한 말이었다.


사실 자기 허락받지 않고 돈을 썼다고 화를 내며 도둑놈이라 소리 지를 때 난 결심했다. 앞으로 교회 돈은 단 한 푼도 건드리지 않겠다. 그날 이후 난 지금까지 그렇게 하였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교회 돈을 유용했는지 조사를 받곤 하였다. 그럴 때면 정말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아프고 '내가 이런 상태에서 목회해야 하나?' 생각을 하였다.


고린도 교회에도 돈 문제로 시끄러웠던 듯하다. 돈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깨끗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바울을 향하여 비판하는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토로하였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거리낌 없이 항변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선교사로 임명받은 우리에게는 그에 걸맞은 편의를 도모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가족을 위해 후원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사도들과 우리 주님의 형제들과 베드로에게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어째서 이의를 제기합니까? 바나바와 나만은 혼자 힘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군인이 자기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군복무를 합니까? 정원사가 자기 정원에서 나온 채소를 먹어서는 안되는 것입니까? 우유 짜는 사람이 통에 담긴 우유를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고전9:3-7, 메시지 성경에서)

바울이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나는 바울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겠으며 그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겠다고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런 면에서 나에게 큰 스승이시다. 자기에게 허락받지 않고 돈을 쓴 것 하나만 보고 도둑놈이라고 늘 욕하던 장로님 때문에 나는 교회 재정에 깨끗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장로님은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가지고 나를 훈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정말 억울하고 가슴이 아팠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사람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다. '너는 그런 사람이다. 어쩔 수 없다. 평가는 내려졌다.' 어렸을 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상처가 되었듯이 평가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상처가 된다. 제 딴에는 위한다고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사랑하기에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그건 평가하는 사람이 스스로 하는 합리화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 중에는 남을 평가하는 단계를 넘어서 남을 정죄하는 일에 빠른 사람들이 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부로 판단하고 욕을 하는 경우를 보면, 내 일이 아니어도 가슴이 미어진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살아오면서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절망한 경험이 얼마나 많으면 그런 소리를 할까? 그런데 정말 사람은 변하지 않을까?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아들이 창녀와 동거하며 사생아를 출산해도 모니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이 이단 종교인 마니교에 빠져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탕자로서 세상에서 방황하였다. 그러나 모니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아들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우리 아들은 반드시 변할 거야!”

어머니라고 아들의 삶을 모를 리가 없다. 아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남들처럼 쉽게 평가하고 판단하고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평가하지 않았다. 사랑하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남을 평가한다는 것은 남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하면 포기할 수 없고 그래서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희망을 둔다. 그리고 엎드려 기도한다.


구약의 솔로몬은 남을 잘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가 그 나라의 마지막 재판장이기 때문이었다. 솔로몬의 한 마디로 모든 판결이 끝나기에 정말 지혜가 필요했다. 혹여나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솔로몬과 같은 마지막 재판관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판단력이 아니라 상대방을 품어 안는 사랑이 필요하다. 상대방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목구멍까지 나오는 판단의 말을 집어삼켜야 한다. 판단하지 마라! 우리는 재판관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고백을 하였다.

“하나님 내 주시여!

내 주여! 당신께 비나니 나를 내신 그 자비!

나는 당신을 잊었어도 당신은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나이다.”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은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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