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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2. 2017

붓을 꺾어야 할까?

진부와 참신

풍경을 잘 찍고 싶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다. 사진 찍기 전 훌륭한 사진을 열심히 보았다. 어느 포인트에서 어떤 각도로 찍었는지 살펴보았다. 그래도 만족할 만한 사진은 나오지 않았다. 남들은 칭찬하였지만, 난 흉내 내기에 그친 사진으로 늘 불만이었다.


그때 박경배 사진작가가 나를 골프장으로 데려갔다. 그는 골프장 사진 전문 작가다. 골프장은 풍경 사진 찍기 가장 어려운 장소 중 하나다. 넓은 초원과 잘 가꾸어진 나무들, 아름다운 호수와 골퍼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어디를 찍어도 예쁠 것 같지만 사정은 녹녹하지 않다.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은 단순히 예쁘다고 다가 아니다.

사람도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조명, 특정한 분위기, 특정한 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 증명 사진이 다르고, 프로필 사진이 다르고, 마음을 교감하는 사진이 다르다. 증명 사진은 아무런 해석도 없이 ‘이 사람은 이런 모습이다.’라고 말한다. 프로필 사진은 상업적 목적에 맞도록 찍는다. 그러나 마음을 교감하는 사진은 피사체에 대한 마음과 생각과 해석이 담겨 있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사진 속에 마음을 담는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여행하면 인증사진을 찍는다. 인증사진은 “나 여기에 다녀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설령 자신의 모습을 빼고 풍경을 찍어도 새로운 해석이나 생각은 없다. 단순히 ‘이곳은 이런 모습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기 위해 미리 풍경 엽서를 살펴본다거나 사진집을 들추어 본 사람이라면 흉내 내기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 또한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극히 진부한 사진일 뿐이다. 늘 보아오던 달력 사진 같다. 물론 그 사진을 처음 찍은 사람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을지 모른다.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고 감격하여 마침내 고가에 팔려 엽서가 되고 달력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흉내 내기 사진들이 넘쳐나고 원작마저 신선함을 잃어버리고 낡은 사진이 된다. 거기에 새로운 마음과 시각을 담아내어 찍지 않고 그저 흉내만 낸다면, 졸렬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풍경 사진을 찍을 때마다 고민하는 것이다. 새로움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카메라를 내려놓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박경배 선생은 나를 골프장으로 데려갔다.

풍경 사진을 찍기 위해 빛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었다. 온종일 빛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새벽에도 저녁에도 사진은 찍지 않고 골프장을 돌아다녔다. 사람처럼 장소도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각도에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는 골프장을 살펴보면서 골프장을 설계한 사람의 의도까지 읽으려 하였다. 어느 특정 장소에 담긴 뜻과 혼을 포착한 이후에야 자신의 의도와 해석과 마음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그가 찍은 풍경 사진은 언제나 신선했다. 그만큼 준비도 철저했다. 장비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찍고자 하는 장소를 수도 없이 방문하였다. 한 장소를 아름답게 찍는 것은 한 사람을 아름답게 찍는 것만큼 마음을 담아야 한다. 자기 생각과 해석이 정립되면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어 본다. 새로운 시도, 새로운 기술도 사용해 본다. 진부하지 않고 참신한 사진을 찍기 위한 그의 노력은 놀라웠다.

진부(陳腐)라는 한자어는 특별하다. 늘어놓을 진(陳)자와 썩을 부(腐)자가 합쳐 이루어진 글자다. 고대 사회에 고기를 맛보기란 쉽지 않다. 중국의 한 농부가 어느 날 호랑이가 멧돼지를 잡아서 먹다 남은 것을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약간의 허풍과 과정을 섞어서 고기를 얻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였다. 부러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멧돼지 고기를 자랑하였다. 그는 사람이 올 때마다 고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시간이 가면서 고기는 썩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썩은 고기 냄새에 익숙해진 농부는 악취가 나는지도 몰랐다. 그의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더 화려해지고 흥미진진해졌지만, 사람들은 그를 찾지 않았다. 고기 썩는 줄도 모르고 자기 자랑만 일삼는 그를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진부(陳腐)가 위험한 까닭이 여기 있다. 자신의 고기가 썩은 줄 모르는 것이다. 이제는 남들이 부러워하던 것이 독이 되어 자연스럽게 왕따가 되었다.  


익숙함 속에서 안주하다 보면 자기 생각과 말과 표현이 썩어가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남들은 다 아는 데 정작 자신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이 장점인 줄 알고 끝까지 붙들려 한다.


진부(陳腐)의 반대말은 참신(斬新)이다. 참신은 벨 참(斬)자에 새로울 신(新)자로 이루어졌다. 참수형(斬首刑)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중국에서는 도끼로 죄인의 목을 쳐서 죽였다. 참신은 구태의연한 과거의 습관과 생각 틀을 도끼로 목을 치듯이 완전히 끊어버리는 행위다.


‘축복받은 집’이란 책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1967~)는 익숙한 언어인 영어를 버렸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새로 배워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영어보다 능숙하지 못했지만, 익숙한 언어로 익숙한 표현법에 사로잡혀서는 새로움을 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언어로 작품을 쓰면서 그녀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줌파 라히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무엘 베케트도 익숙한 영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였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쓴 헝가리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도 프랑스어로 글을 썼으며, ‘롤리타’를 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영어로, ‘로드 짐’을 쓴 우크라이나 작가 조셉 콘래드 역시 영어로 글을 썼다. 진부함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하여 그들은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하였다.


물론 단순히 변화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변화를 변화답게 하려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사진 한 장 제대로 찍기 위하여 보고 또 보는 집중력을 보였던 사진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내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난 풍경 사진작가가 되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좋은 사진, 새로운 해석과 감각을 담은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집중력과 철저한 연구와 준비를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내가 찍고자 했던 풍경 사진에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난 이제 아름다운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사진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 아마추어의 작은 욕심은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요즘 글을 잘 써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매일 같이 책을 읽고 공부하고 사색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는다. 붓을 또 꺾어야 할까! 글쓰기도 아마추어의 작은 욕심으로 끝나지 않을까 자못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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