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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Feb 09. 2018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가야 했을까?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 했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바울을 말렸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가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합니다.” 심지어 바울의 목을 안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가지 마세요.” 그러나 아무도 바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바울은 자기가 가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바울은 자기가 받은 사명의 마침표는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안디옥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은 후 바울은 10년이 넘도록 외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안 후 전심을 다 하여 선교하였다. 2,000년 전 여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차를 타고 바울의 선교지를 돌아본 적이 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차로 10시간을 달려야 했다. 그가 선교하면서 열매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지만, 핍박과 반대도 많았다. 특별히 동포인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대하고 심지어 돌로 치기도 하였다. 그는 유대인이 무서워서 선교하다 급히 다른 곳으로 도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동포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노는 바로다.” (롬9:2)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다.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만 한다면 분명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두렵고 떨림이 있었지만,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데리고 간 제자들의 머리를 깎았고 정결례도 행하였다. 그의 수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바울을 보자 우르르 모여들어 죽으라고 때리기 시작하였다. 


폭력에는 3가지가 있다. 첫째, 화가 나서 우발적으로 때리는 경우다. 둘째, 누군가를 모욕하기 위하여 때리는 경우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때리기는 쉽지 않다. 오른손으로 때리면 상대방의 왼편 뺨이 맞기 마련이다. 따라서 오른편 뺨을 쳤다는 말은 손바닥으로 때린 것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뜻이다. 그것은 모욕적인 행동이다. 상대방을 욕보이기 위하여 손등으로 때린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 나를 모욕하여 손등으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였다. 


마지막 단계는 죽으라고 때리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주먹만 사용하지 않고, 몽둥이도 사용하고 돌도 사용하여 때린다. 추호도 용서가 없다. 마구잡이로 때린다. 이것은 폭력 중의 마지막 단계이다. 지금 바울에게 가하는 폭력이 바로 죽으라고 때리는 것이다. 


로마 천부장이 군대를 동원하여 말리지 않았다면, 바울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군대가 왔지만,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군사들은 바울을 어깨에 메고 옮겨야만 했다. 사람들은 바울을 뒤따르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상황이 겨우 진정되자, 피투성이가 된 바울은 동포 유대인 앞에 섰다. 그는 동포들이 쓰는 히브리어로 말하였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행22:1) 


이 구절은 국어책 읽듯이 읽으면 절대 안 된다. 여기 바울의 마음과 감정을 오롯이 담아 읽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개역 성경은 감정을 담아내기가 참 어렵게 번역하였다. 마치 싸우자는 듯 보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성경’은 좀 쉽게 번역하였다. “여러 어른들과 형제 여러분, 내가 변명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선교할 때마다 따라 다니며 훼방하고 공격했던 유대인들, 지금도 죽으라고 때리는 저들을 향해 바울은 ‘여러 어른들과 형제 여러분’하고 불렀다. 공회 앞에서도 그는 같은 자세로 말하였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행23:1) 바울은 저들을 눈곱만큼도 미워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전심으로 그들을 품어 안으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전투적이지 않다. 

인도에서 35년간 선교사역을 한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은 65세에 은퇴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청춘을 바쳐 선교하고 헌신한 뉴비긴은 영국으로 돌아가서 안식하기를 원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쉴 수 없었다. 영국 교회는 물질주의에 함몰되었고, 교회는 세속화되어 영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교인들은 패배주의에 빠진 교회를 떠나고 예배당은 텅 비었다. 영국 교회는 병들어 회복 불능 상태였다. 모두 손 놓고 힘을 잃어버리고 있을 때 은퇴 선교사 레슬리 뉴비긴은 자기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국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동포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는 영국 교회를 깨우기 시작했다. 은퇴한 노선교사는 영국 교회를 깨우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선교는 해외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영국 교회와 교인이 선교적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선교적 교회론을 주창하여서 병든 교회를 깨우기 시작했다.  안식하려던 계획은 무너졌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조국과 동포를 사랑했기 때문에 노년의 삶을 조국인 영국을 위하여 기꺼이 바쳤다.  


바울은 안식하려고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 복음을 전하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예루살렘에 갔다. 그러나 결코 전투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갔다. 내 혈육 내 동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게 되면, 반드시 돌아올 거로 생각했다. 사람들이 욕하고 때려서 눈두덩이 부어오르고, 얼굴이 피범벅 되어도 그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돌을 던지는 사람들, 침을 뱉는 사람들,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그는 사랑으로 호소하였다. 형제 여러분! 어르신 여러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복음이다. 그는 결코 그들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품어 안으려고 했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너무 전투적인 것 같아서 안타깝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방하고, 데모하고, 나라를 망가뜨린다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자비, 긍휼, 용서를 보여야 할 사람들이 분노, 욕설, 싸움, 갈등을 보인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마음은 레슬리 뉴비긴의 안타까움으로 외친 선교적 교회론과 사도 바울의 다함 없는 사랑으로 생명바친 선교 정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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