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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26. 2019

사랑과 자기 유익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나쁠까? 공동번역은 ‘자기 유익’을 ‘사욕’으로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이기적’으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욕심을 주셨다. 욕심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무엇을 추구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욕심(욕구)이 없다면 게으르고 나태할 뿐 발전을 이룰 수 없다. 동물은 먹을 것과 잠잘 곳만 있으면 만족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무언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욕심이 인간 문명을 만들었다.


욕심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경제학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애덤 스미스이다. 아담 스미스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장로교 신자였다(Cox, 166/348). 그는 ‘국부론’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과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Cox, 169/348, 재인용).


그는 칼빈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인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언급했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 결실도 얻게 된다”(Buchholz, 47, 재인용).


인간의 욕구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사람으로 심리학자 매슬로(Maslow, 1908-1970)가 있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설명하였다. 곧 생리적 욕구, 안정과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인정과 자존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신 기본적인 욕구와 욕심을 없애야 기뻐하실까? 땅의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영적인 것만 추구해야 기뻐하실까? 휴가를 가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불행하고, 근심하고, 날마다 울상을 짓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뜻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욕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를 보이라는 뜻이다. ‘주님 모시고 사는 삶이 얼마나 복된지’를 나타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세상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주기도문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독생자 예수라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을 리 없다. 예수님도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셨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의 뜻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아야 한다. 선물에만 관심을 가지고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문제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정말 귀하고 아름답고 좋다. 나의 생명, 나의 물질, 나의 가족, 나의 사랑, 나의 건강. 하나님은 쓸데없는 것을 주지 않으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너무 귀해서 우리는 그만 정신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잊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 하나님의 선물은 우상으로 바뀌어버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우상숭배, 자기 욕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순간 사랑은 왜곡되고 변질된다. 


두 번째 하나님의 선물을 기뻐할 때 언제나 주신 분(하나님)과 함께 기뻐해야 한다. 존 파이퍼는 이것을 ‘더불어’란 말로 설명하였다(Rigney, 114-15).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다(고전 10:31). 우리가 이 땅에서 맛보고 누리는 모든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감사다. 


세 번째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사람과 나누는 ‘더불어’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나라를 주시고, 복을 주신 이유는 더불어 나누라는 것이다. 약한 자를 돌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주변의 사람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나아가 열방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이기심, 자기 민족 중심주의 때문이다. 민족 이기심은 이방(열방, 약자, 고아와 과부, 난민, 종)을 타자화하였다. 그들은 더불어 함께 사는 삶에 관심이 없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랑이고, 타자를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타자를 생각하지 못하는 자기 중심주의, 이기주의,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사랑은 타자를 향한 사랑이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참고도서 

Cox Harvey, 신이 된 시장 E-book(The Market as God), 유강은 옮김, 서울 : 문예출판사, 2018년

Buchholz Todd G.,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New Ideas from dead Economists), 이승환 옮김, 서울 : 김영사, 1995년

Rigney Joe, 땅의 것들(The Things of Earthe : Treasurig God by Enjoying His Gifts), 손현선 옮김, 서울 : 좋은 씨앗,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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