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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28. 2019

요한계시록은 복음서이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2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다. 다신교 사회를 이해하려면 가까운 일본을 보면 된다. 일본은 ‘인구수보다 신의 수가 많다’고 한다. 그 말은 어떤 새로운 신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 어떤 신도 온 마음을 다해 섬길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일본인은 특정한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다. 출생 의식은 신도식으로, 결혼식은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지 일본은 온 국민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신사 참배를 한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할 때도 신사 참배와 천황 숭배를 함께 강요하였다. 이는 전체주의 국가가 보이는 공통된 특징이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러했고, 로마의 황제가 그러했다. 


로마 황제는 각 나라와 사회에서 믿는 신앙에 간섭하지 않았다. 소위 관용정책이다. 로마 제국에 굴복한다면, 종교나 정치나 문화에 대해선 관용하였다.  로마는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하여 한 가지 공통된 신앙, 곧 황제 숭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니까 황제 숭배는 정말 황제를 신으로 생각해서라기보다 제국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후일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하나님을 신실히 믿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유익과 목적을 위함이었다. 


로마가 일본보다 못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로마 종교에는 윤리가 없었다. 고대는 윤리와 종교가 분리되었다. 고대 신전에서 온갖 음란한 행위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사제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종교는 윤리를 초월하였다. 고대 바알 종교를 비롯하여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고대 신전은 탐욕과 정욕과 음란과 폭력을 섬기는 장소였다.  따라서 우상을 숭배한다는 이야기는 윤리를 버렸다는 뜻이다. 

반대로 기독교는 종교와 윤리를 하나로 연결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했다. 거짓과 부정과 탐욕과 폭력과 음란을 마땅히 버려야 했다. 기독교는 죄악으로 얼룩진 사회에서 한 줄기 빛이었다. 수많은 폭력과 억압 속에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복음이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므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결코 로마 황제를 숭배할 수 없었다.


더욱이 로마가 내세우는 평화(Pax Romana)는 칼과 창으로 만든 것이었다. 남의 나라를 공격하여 살인과 폭력과 억압으로 굴복시켜 평화를 만들었다. 수많은 가장이 죽었고, 여자들은 강간당했으며, 노예로 끌려갔다. 로마의 평화 뒤에는 섬뜩할 정도로 잔인함이 묻어 있었고, 수많은 사람의 눈물과 한이 서려 있었다. 로마의 평화는 칼과 창으로 쌓은 성벽 안에서 이루어진 거짓 평화였다. 그 성벽 안의 평화를 맛보려면, 로마에 항복할 때만 가능하였다.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 밖의 사람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위협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희생과 헌신으로 평화를 만들었다.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것은 모든 약한 자들, 이방인들, 억압당하는 자들, 갇힌 자들, 사로잡힌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였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칼로써 만든 평화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드는 평화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굴복할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비록 칼과 창의 공포가 있고, 죽음의 위협이 있어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그리스도인은 굴복할 수 없었다. 로마 제국의 군대가 아무리 강하고, 세상이 아무리 어둠과 죄악으로 덮였다 해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노력은 멈출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핍박이 가장 심하고 잔인할 때 쓰인 책이다. 그럼에도 사도 요한은 패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악한 세상을 무너뜨릴 것을 믿었다. 요한계시록은 죄악 된 권력을 두려워하는 책이 아니다. 사단의 권세가 너무 커서 우리가 도저히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루어주소서 간구하는 패배주의를 담은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악한 세상과 싸워 이기자는 호전적인 책도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동안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에서 강조해온 하나님의 사랑을 종말론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실천하자고 요청하는 복음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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