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Aug 03. 2019

성내는 사랑, 성내지 않는 사랑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빌미로 한국 경제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제재조치를 취하였다.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일본에 대해 민족적 감정은 고조되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하고 지배하던 시절, 일본의 힘과 문화와 경제력 앞에 고개 숙였던 친일파들이 보인 행태는 일견 일리 있어 보였다. 

‘싸워보았자 아무 소용없다. 

피해 보는 건 우리뿐이다.

힘 있는 일본에 배울 것이 많다. 

그들의 문화와 산업이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이 발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럴듯한 논리를 앞세워 친일 했던 사람들은 민족이나 동포를 생각하기보다 자기의 영화와 안위에 몰두하였다. 힘의 논리, 세상의 논리는 언제나 사회를 이끌어 가는 듯 보인다. 


프랑스의 마지막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 1917~2013)은 ‘분노하라’는 책을 썼다. 독일이 유럽 전역을 지배하고 프랑스를 점령하였다. 군대도 없고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힘이 없다고, 약하다고 불의 앞에 고개 숙일 수 없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부조리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자기 생명을 내던지며 저항하겠다는 것이 레지스탕스다. 그는 독일 패망 후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가 되어 '세계 인권 선언'을 작성하였다. 그는 '분노하라'는 책에서 나약한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권면한다. 사회의 부조리와 악을 보고 머리 숙이지 마라. 건강한 사회는 건강한 저항으로 만들어진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사회의 불의는 계속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외쳤다. 자유, 정의, 인권, 선거권, 민주 제도, 교육권, 등은 모두 약자들의 저항으로 만들어냈다. 결코 강자들이 공짜로 가져다주지 않는다. 힘이 없다고 기죽어 강자의 비위나 맞추는 삶은 비굴하다. 조직이나 힘 앞에서는 두려워하고 비겁하면서, 약한 사람 앞에서 큰 소리치는 것은 세상 권력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비겁함이다. 


예수님은 종교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심한 욕을 하였다. 그것은 1세기 유대 사회의 종교 권력 시스템이 가지는 불의와 부패를 욕한 것이다. 예수님은 종교 권력의 비호 아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았다. 예수님은 어느 개인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다. 예수님은 인간의 조직(종교, 사회, 국가, 민족)이 불의와 악에 사로잡힐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지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기꺼이 자기의 생명을 바치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예수님은 죄인들을 죄악 된 세상에서, 악의 시스템에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와 부패함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화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구조적 악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 교묘하게 작동하는 사단의 시스템이다. 


사랑은 화를 낸다. 악에 대하여, 사단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죄악 된 사회 시스템에 대하여 화를 낸다. 힘이 있다고 약자를 억누르는 조직들, 구조들, 민족들, 사회에 대하여 화를 낸다. 예수님의 화는 결코 감정적이지 않다. 예수님의 분노는 사회를 변혁하여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분노이다. 예수님의 분노는 파괴적이 아니라 건설적이다. 예수님의 분노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예수님은 죄악 된 세상에서 신음하는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남편을 수도 없이 바꾼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을 비난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민족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살았던 세리장 삭개오를 심판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성을 내지 않았다. 

예수님은 허리에 창을 찌르는 로마 군인을 욕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는 가롯 유다를 저주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하여 성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에게 성내지 않는다. 

사랑은 죄악 된 조직과 구조에 성을 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자는 누구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