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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03. 2019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약자는 고통과 슬픔, 상처와 억울함을 늘 친구처럼 달고 산다. 이런 쓴 경험을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복수이고 다른 하나는 자책(自責)이다. 


복수심은 상처받았다고 느낄 때 생겨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똑같이 상처 주고 싶다는 생각, 그를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증오는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증오는 상처 난 사랑이다. 


증오는 자기가 들고 있는 강한 방패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게 나를 보호해주는 방패다. 동시에 증오는 다른 사람을 향해 겨누는 창이다(Grun, 72%). 복수심은 폭력적인 상상을 한다. 상상 속에서 당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억누르고,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다, 마침내 죽이는 모습을 그린다.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혹간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개 약자의 복수는 상상으로 끝난다. 


복수를 실천하지 못하는 약자는 대개 불평을 입에 달고 산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해의식 속에 살아간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원망한다. 하늘을 원망하고, 운명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한다.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친구를 원망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상사를 원망한다. 그렇게 인생은 망가진다. 


실천하지 못하는 복수는 남을 향해 원망하지만, 자신을 향해선 자책한다. 그것은 또 다른 복수심의 일종이다. 복수를 내면화하면 자기가 가학자이면서 동시에 희생자가 된다. 니체는 말했다. “누군가가 사람들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고통받는 자가 자신의 고통에 맞서 자신에게 복수의 꿀을 처방한다는 것이다”(심강현, 65%)


강자들은 늘 가르쳤다. 종교마다 보복 금지 규정을 가진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 모두가 사랑과 평화와 용서를 가르친다. 가톨릭의 고해 송에는 ‘네 탓이 없습니다 오직 내 탓뿐입니다’가 있다. 불교의 화엄경에서도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一切唯心造)이라 가르친다. 공연히 복수할 생각, 저항할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작 각 종교의 지도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누구보다 강력하게 복수를 시행한다. 지하드를 조장하는 이슬람 지도자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와 히틀러 나치즘에 개신교와 가톨릭은 적극 동조했다. 멀리 다른 나라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본 강점기 우리나라 종교 지도자 대부분은 약한 자,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서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 앞에 무릎 꿇었다. 다종교를 인정하는 힌두교나 불교 역시 예외는 아니다. 로힝야 사태나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에서 그들이 얼마나 말과 행동이 다른지 보여준다. 


‘내 탓이요’ 노래 부르며 문제의 원인과 잘못이 자기에게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 책망하고, 스스로 회개하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복수를 실천함으로 두 개의 무덤을 만들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약자에게 선택 폭은 넓지 않다. 


증오, 분노, 복수심, 미움, 고통은 강력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인생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때로 가슴 저미는 통곡이 되기도 하고, 때로 말없이 치켜드는 촛불이 되기도 하고, 때로 몽둥이를 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부정적 감정이 꼭 부정적 결과만 만들진 않는다. 그것은 자신처럼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갖게 하고, 어둠과 슬픔 속에서 세상을 통찰하는 시야를 열고, 자신을 치유하며 타인을 치유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좋은 양상만 좋아해선 안 된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 쓰리고 아픈 부분, 외면과 배신으로 상처난 부분, 증오와 적개심으로 복수하려는 부분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추함을 추함으로 만들지 않고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 니체는 말했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다. 나는 비난하지 않겠다. 심지어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비난하지 않겠다. 시선을 돌리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나는 긍정하는 사람 그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Balthasar, 168)

개신교에서도 존경받는 가톨릭 영성가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 1934~2013)이 있다.매닝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앉아 주거나 껴안거나 입 맞춰 준 기억이 전혀 없다. 그는 귀찮은 존재, 골칫거리로 통했고 늘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세 살 때 고아가 되어 보육원에서 살다 입양되었다. 입양 가정에서도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아이를 사랑할 줄 몰랐다. 


매닝이 여섯 살 때였다. 눈 내리던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놈들이 온종일 말 잘 들었나?” 어머니는 매닝의 한 살 위 형 롭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제 불능이에요. 당장 경찰서에 데려다 주세요. 경찰들한테 감옥에 처넣으라고 해요.”아버지는 정말 그대로 했다. 매닝은 창틀에 무릎 꿇고 앉아 유리창에 코를 박고 형이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반 시간 후 아버지 혼자 밤 거리를 걸어왔다. 뺨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제 곧 자기도 버려질 것이다. 그때 30미터쯤 뒤로 형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매닝은 일생 강박적 불안감, 열등감, 열패감으로 고통받았다. 


성인이 된 후, 어느날 아침 기도하는 중 환상을 보았다. 여섯 살 나이 보육원 창문틀에 코를 박고 있는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 자신을 입양해 줄 마음씨 좋은 두 사람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모습이었다. 6살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순간 브레넌 매닝도 울었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 분노, 사랑 없음, 방치, 외면, 모든 것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울면서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했다. 어머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실수했을지 모르나 너는 이렇게 잘되었구나.” 그는 뜨겁게 어머니를 끌어안고 한동안 펑펑 울었다(Manning, 31-34)


Manning Brennan, ‘신뢰’(Ruthless Trust), 윤종석 옮김, 서울 : 복있는사람, 2017년

Grun Anselm,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Wege der Verwandlung) E-book, 안미라 옮김, 서울 : 챕터하우스, 2018년

심강현,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E-book, 서울 : 을유문화사, 2016년

Fineman Stephen, ‘복수의 심리학’(Revenge), E-book, 이재경 옮김, 서울 : 반니, 2018년

Palmer J. Parker,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 E-book, 김찬호 옮김, 서울 : 글항아리, 2018년

Thomass Balthasar, ‘우울할 땐 니체’(S’affirmer avec Nietzsche), 김부용 옮김, 서울 : 자음과 모음,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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