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적 전쟁

복음과 영적 전쟁 2

by Logos Brunch

영적 전쟁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칼과 창을 들고 피를 흘리며 싸우는 모습이 생각나십니까? 물러서면 진다는 생각으로 앞을 향하여 전진하는 용감한 군사가 떠오르십니까?


중세 기독교는 칼과 창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라 여기며 목숨을 걸고 이교도들을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식민주의 시대에는 먼저 군대를 동원하여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강제로 개종시켰습니다. 힘으로 억누르고, 공포로 위협하여 무릎 꿇리면 되는 줄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는 돈이 모든 것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복음전파도 돈이 없으면 못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때 대한민국이 잘나가던 때, 정확히 말하면 교회에 돈이 쌓이고 넘칠 때 우리는 돈으로 선교를 많이 했습니다. 제 3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한국식 예배, 한국식 교회 정치를 심기에 바빴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힘의 논리를 사용했습니다. 칼과 창에서, 대포와 군함으로, 그리고 돈으로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힘을 사용한 선교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전쟁일까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사랑과 평화와 은혜와 자비와 용서와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언제나 이리저리 찢기고 상처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배척당하고 손가락질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이 싫었습니다.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으면 안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불을 던져 주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돌을 맞으면서,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민족 앞에 다시 섭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퍼부어 주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배반하고 외면하고 왕따시키는 그들 앞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뜨거워 나갔던 예레미야는 결국 동포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영적 전쟁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였습니다. 예수님도 예레미야와 비슷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지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들을 위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저들 대신 벌을 받으시고, 저들의 모든 죄를 짊어져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도망치거나 배신하거나 후욕했습니다. 단 한 명도 예수님의 마음과 희생과 피 흘림을 알아주지 않는데 예수님은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건 분명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건 분명 패배입니다. 그런데 그건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전쟁은 패배를 통한 승리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뺨을 때립니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고개가 휙 젖혀졌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데 다른 쪽 뺨을 또 돌려대십니다.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치는데 막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꼭 안아주십니다. 자신의 상처보다 분노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마음 깊은 곳 상처를 어루만져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힘으로 말을 합니다. 힘없는 자들은 작은 촛불을 모으고 모아서 온 들판을 태울 수 있다고 믿으며 힘을 모읍니다. 그게 세상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정의가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른 법을 만들고 세우려고 합니다. 법을 잘 지키나 감시 감독하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게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anita-austvika-5hZQCYOK3sk-unsplash.jpg

만일 법으로 하고 힘으로 하면 하나님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뺨을 맞고, 불의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 허연 배를 드러내는 양처럼 그렇게 조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로 짓밟아 버리는 자를 오히려 품으시는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을 상징으로 사용하여 승리하신 예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최후 승리는 정의나 법의 승리가 아니고 십자가 사랑의 승리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을 던져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