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속의 사람들은 어둠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지만, 어둠의 사람들은 빛의 세계의 사람들이 잘 보입니다. 빛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둠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 양석일
재일교포 소설가 양석일은 어둠 속 세계와 마주하려는 ‘어둠의 상상력’이야말로 작가에게 필수 불가결하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부활절은 기독교 최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성가대는 부활절 칸타타를 준비합니다.
아름다운 화음과 우렁찬 목소리로 ‘주께서 부활하셨다’ 힘차게 찬양합니다.
설교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 있게 선포합니다.
부활의 감격으로 가득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교인들이 부활을 어떻게 선포했을까요?
목소리를 높이기는커녕 숨죽이며 조용히 ‘부활’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처음 부활의 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고향 땅 엠마오로 힘없이 내려가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초대교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 그건 사실이었고 현실이었습니다.
의심하던 도마가 변하여 믿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최대 신앙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세상으로 뛰쳐나가 큰 소리로 ‘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쳤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조용히 너무나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왜요?
죽음이 무서워서요?
핍박이 두려워서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건 예수의 부활 정신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습기 차고 침침한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너무나 조용하셨습니다.
소리치고 외치시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도 알아차릴 수 없도록 조용히 다가오셨습니다.
불신으로 가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 곁에 살그머니 다가가시는 부활의 예수님은 낯설기까지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왜 소리치지 않으셨을까요?
불신으로 가득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어두운 세상은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예수님은 온 세상을 비출 큰 빛이었지만, 이 어둠의 세계에 아주 작은 빛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밝은 대낮에도 암막을 치고 늦잠 자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커튼을 확 열어젖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배려해서 그들 곁에 조용히, 천천히 다가오십니다.
부활절이 귀중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자를 헤아리셨습니다.
소리 높인다고 다가 아닙니다.
나는 빛에 속했다고 나는 의로워졌다고 어둔 세상에 나가 저들을 무시하고 깔보면서 소리치는 부활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생명 내어주신 주님의 자세는 조용히 천천히 지혜롭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첫 번 부활은 그렇게 조용하고 작은 불빛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등에 업고(/없고)' 세상을 다 비출 '큰 빛' 인양 착각하는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