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플마 Sep 22. 2019

허세남의 제야 음악회

멋지게 쓰리 쿠션으로 당구 게임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누군가 팔을 툭툭 쳐댔다.

   '뭐야, 이건?'

살짝 화를 내려했다가 지금은 내가 화낼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민망함에 지그시 눈을 감고 멋진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감상하는 척을 해야 했다. 아, 여기는 당구장이 아니라 음악 콘서트홀이 아니던가? 콘서트는 오늘 음악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합창 교향곡이 진행되고 있었다. 난 아내와 함께 2017 제야음악회에 와 있던 것이다.

   "음악 감상하는 척해도 소용없어. 코까지 골았으면서. 창피하니까 정신 좀 차려 봐."

   "깜빡한 것 같은데, 그렇게 깊이 잠들었었나? 미안, 미안."

    

그놈의 쭈꾸미가 문제였던가? 아니면 문성 형님이 문제였던가?

금일 우리 일요 조기 축구팀에서는 2017년의 마지막 게임을 축하하기 위해서 싱싱한 쭈꾸미를 점심으로 내놓았다. 모두들 신나게 힘차게 축구를 끝낸 후 쭈꾸미에 입맛 다시며 음식점으로 향할 때였다.

   "에이, 마누라가 빨리 들어오래네. 집안 대청소하자구. 어떡할까?"

아내를 끔찍이도 위하는 문성 형님의 넋두리였다.

   "야, 빨리 가봐라. 너 니 마누라 말 안 들으면 뒤탈이 좀  있잖아?"

우리 축구팀의 제일 맏형이신 A 형님께서 한마디 했다.

그렇게 문성 형님은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음식점에서 쭈꾸미 파티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문성이 걔는 왜 그렇게 사는지 몰라? 그 나이에 지금도 그렇게 잡혀 살고 있으니."

   "맞아, 우리는 일요일은 완전히 노터치인데. 난 마누라가 저녁까지 먹고 오래."

B 형님이 의기양양하게 맞장구를 쳤다.

   "에이, 형님은 집에서 쫓겨난 거지. 집에 있으면 잔소리나 해되고 또 밥도 챙겨줘야 하니까 형수님이 귀찮아서 그런 거지."

벌써 30년 이상을 친구처럼 지내온 이들은 서로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훤히 아는 사이들이다.

아무튼 서로들 시끄럽게 떠들며 쭈꾸미에 소주 한잔씩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도마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플마도 전에는 집에 일찍 들어갔었잖아. 요즘은 괜찮아?"

   "플마는 전에는 아들 학원 픽업해주느라 그런 거고 지금은 애가 대학도  갔으니 자유롭죠. 플마는 잡혀 살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요즘도 3시 전에는 꼭 들어가던데. 저녁도 한번 안 먹고."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완전히 공처가로 낙인찍힐 듯했다. 내가 나섰다.

   "에이, 제 와이프는 저한테 그렇게 간섭하지 않아요. 제가 일찍 들어갈 때는 집안 행사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오늘은 '쭈꾸미 파티'가 있다고 하니까, 와이프가 '그럼, 늦게 오겠네?'라고 했는데요. 제가 쭈꾸미를 워낙 좋아하는걸 잘 아니까."

   "그래? 그러면 오늘은 편하게 좀 마셔봐."

그러면서 나를 중심으로 소주잔이 분주하게 오가기 시작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어쩌면 난 그 자리에서 그냥 뻗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음식점 주인이 우리를 쫓아내고 다음 손님을 받고 싶어 하는 심중을 적절하게 잘 어필하였고, 우리는 할 수 없이 쭈꾸미 파티를 끝내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이제 목욕탕에서 좀 쉬면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겠지?'

사실 오늘은 아내가 되도록 일찍 들어오라고 했었다. 쭈꾸미에 너무 유혹당하지 말 것도 당부했었다. 저녁에 제야음악회에 가야 하는데 오후에 산책 좀 하고 저녁 외식도 좀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축구만으로도 지쳐 있을 몸에 알코올을 부어댔으니 이미 내 몸은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목욕탕에서 한 두어 시간만 푹 자자.'

목욕탕으로 향할 때의 계획은 이랬다. 그랬는데 목욕탕의 뜨뜻한 탕 안에서 이런저런 잡담들을 하던 중 이 계획은 멀리멀리 달아나 버렸다. 우리 축구팀 내에서의 당구 라이벌 관계가 화두에 올랐는데, 금일 제대로 결판을 내보자는 것에 모두 의기투합이 되었다.

   "플마도 오늘 끝까지 한판 하는 거지? 오늘 자유라며?"

나도 제대로 씻는 둥 마는 둥 그런 상태로 당구장에 휩쓸려갔다. 당구라면 나도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판은 시작되었고, 저녁 삼겹살 내기로 판은 점점 더 무르익어갔다. 내일도 휴일이니 이 사람들에게 오늘은 밤새껏 놀아도 괜찮은 하루였던 것이다.    

한참 당구에 열을 올리다 갑자기 아내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휴대폰의 카톡에는 이미 아내로부터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잔뜩 화난 표정의 이모티콘들이 마구 쌓여 있었다.

아뿔싸!

   '오늘 제야음악회는 표 구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랬는데.'

부랴부랴 당구를 정리하고 집에 와보니, 의외로 아내는 담담했다.

   "오후 산책은 포기했고, 나가서 저녁이나 사 먹자구. 지금 되게 피곤해 보이니까 일단 잠이나 조금 자 둬. 이따가 음악회 가서 자지 말고."

몹시도 피곤했던 나는 아내의 그 말을 듣자마자 고꾸라져 자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는 내 속이 너무 좋지 않았던 관계로 건너뛰어 버리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난 한 가지 실수를 더 했다. 잠실의 콘서트 장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몸이 피곤했던 내가 자가용을 고집하였고 음주 상태였던 내가 운전을 할 수는 없었기에 아내가 운전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일대의 교통 혼잡과 진입금지 통제 때문에 아내는 생고생을 해야만 했다.    

2017년의 마지막 날을 멋진 무드 속에 보내기를 기대했던 아내의 바람은, '난 절대로 공처가가 아니올시다'라는 나의 쓸데없는 허세 속에 사그라져 버렸다.

아, 그렇다. 공처가라 불리면 어떻고 애처가라 불리면 어떠랴? 그냥 부부간에 재미있게 살면 최고인 것을.   


(2018년 1월 1일)  


<홍플마의 또다른 재미있는 글>

목걸이를  사지 말아야 할 이유

매거진의 이전글 고구마 아니 멸치만 먹으며 살 뻔했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