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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플마 Dec 13. 2021

고구마 아니 멸치만 먹으며 살 뻔했던 이야기

뭔가 싸늘해진 분위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아내는 갑작스레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내는 여느 때처럼 즐겁게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탁에서의 오손도손 대화를 기대하면서. 드디어 상차림이 끝나고 우리가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 식탁 한편에 한 무더기의 찐 고구마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적당히 몇 개만 찌셔도 될 것을 항상 한꺼번에 다 찌시더라구. 저걸 어떻게 다 먹어? 다 먹지 못하고 버린 게 바로 얼마 전인데 그런데도  그러시네"
그랬다. 어머니는 손이 무척 크신 분이었고 그에 대해서 아내는 불만이 많았다. 사실은 외에도 바꾸지 않는 당신의 오랜 습관들 몇 가지가 아내에게는 불만 유발 인자였다. 하지만 그 불만은 그저 내게 넋두리나 하는 정도였고, 내가 보기엔 아내는 어머니와 아주 원만한 고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얘기할 때  내가 좀 다독여주면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내가 왜 그랬을까?
아내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여 잠시 방심해서였을까?
   "좋은데 뭘 그래. 우리들 두고두고 먹으라고 그러신 것이구만."
순간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고구마가 그리 좋으면 이제부턴 고구마만 드시지. 그 밥도 이리 내놓."
난 그날 저녁 고구마 한 개로 끼니를 때웠다. 사실 나는 다이어트를 하고 싶었었는데 아내가 애써 차린 식탁을 거부도 못하고 있던 참이라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런 내 속을 모르는 아내는 내게 화풀이를 제대로 했다고 생각했는지 기분이 좀 풀린 듯했다. 다행이었다. 다이어트 때문에 얼씨구나 하며 고구마로 한끼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매 끼니를 고구마로 때우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난 의문이 들었다. 농담조로 한 내 말이 아내를 그렇게 골라게 할 정도의 말이었나? 아내의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그렇게 컸었나? 평소에는 사이가 좋았기에 잘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신문의 '별별다방'이라는 에세이 코너에서, 홍여사란 분이 작성한 '날 닮은 아들을 구박하는 아내'라는 글을 읽으며 성격이 다른 고부 사이가 어떤 것인지 약간은 알 듯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꼼꼼하고 소심한 어느 남자가 자기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서로는 자신들의 성격에 대해서 약간의 불만이 있었던 터라 상대방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며 잘 살고 있었다. 아들과 딸도 하나씩 두고 화목한 집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조금씩 커가면서, 아들은 아빠의 성격을 딸은 엄마의 성격을 쏙 빼닮은 것이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가 문제였다. 엄마는 딸이 조금 실수를 해도 잘 다독여주며 격려를 해주는 편이었는데 아들에게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아들의 모든 습관을 뜯어고치려 했고 아들이 좀 실수를 하면 딸에게 보여주던 너그러움도 없었다. 그런 아내의 태도는 마치 남편에게 해야 할 분풀이를 아들에게 하는 듯했다. 아빠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태도는 예전과 다름없는 좋은 모습이었다. 남편의 고민은 깊어진다.
   '내 성격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억지로 참고 사는 것인가? 진짜 이 성격이 마음에 안 드나 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우연히 아내의 한마디를 주어 듣고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넌 어쩌면 그렇게 발가락까지 쏙 빼닮았냐? 안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내가 아들의 발톱을 깎아주며 하는 중얼거림이었는데, 아들은 독특한 모양의 엄지발가락을 갖고 있었다.
  '아하, 그래서였군.'
남편의 엄지발가락은 전혀 그런 모양이 아니었다. 그런 모양의 엄지발가락을 갖고 있는 사람은 바로 시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랬다. 시어머니는 그 꼼꼼하고 소심한 성격을 아들에게 그리고 손자에게 대물림을 해줬던 것이다.
그동안 아내는 시어머니께 더할 나위 없는 착한 며느리였기에 시어머니에 대한 큰 불만이 있으리라고는 남편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성격이 전혀 다른 시어머니가 아내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남편 하고는 가끔 부부싸움이라도 하면서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에게는 불만을 직접 해소할 방법이 없었으니.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사는데, 대부분은 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들일지라도 백 퍼센트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자기 자식, 부모, 아내, 남편에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나쁜 습관들이 얼마나 많은가? 절대로 내 입맛에 맞게 고칠 수 없는 그런 습관들. 우리는 남들의 이런 습관들을 인정해주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에도 좋고 어차피 어울려 살아가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에의 인정이 쉽게 안 되는 관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고부간 관계이다. 고부간에는 그 둘 사이를 이질적으로 배척하게 만드는 어떤 기운이 있는 것처럼.


우리 어머니는 매우 완고하신 성격이라서 당신이 결정하신 몇몇 사항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가 없으셨고 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불편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고집 센 시어머니를 모시고도 집안 전체를 화목하게 이끄는 아내는 참으로 현명했고 덕분에 나도 마음이 편했다. 고부간 관계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은 집의 사연을 들어보면 난 참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어머니를 대함에 있어 두 가지 기준을 갖고 있다.
첫째는 노인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습관을 고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맞춰야 한다. 이는 재활의학 전문의인 아내가 요양 병원에서 고집 센 노인분들과 오랜 세월 부대끼며 얻은 경험에 근거하는 것 같다.
둘째는 사람은 저마다의 인생이  있는데, 다른  사람의 인생 형태를 내 기준에 맞추도록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내는 아들에게 '엄마 아빠가 원하는 삶이 아닌 네가 살고 싶은 인생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라.'라고 한다. 아들은 시험 기간에조차도 허구한 날 게임만 하고 있을 때가 많았었는데, 그래도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람이라서 그랬는지 시어머니께도 '이 습관 좀 고쳐주세요. 저 습관 좀 바꿔주세요'라는 주문이 일체 없었다. 아내는 말한다. '진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할 사람은 애가 아니라 어머니야. 애는 아직도 많은 기회가 있지만 어머니께는 시간이 별로...'
그런데 이런 원칙을 갖고 있다 해도 시어머니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좀 더 잘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고구마 사건이 있은 후 며칠 뒤의 일이다. 아내와 함께 외출했다 돌아오니 우리 집 현관 앞에 굉장히 큰 택배 박스가 있었다.
   "어머니 이게 무슨 택배예요?"
   "통영에서 멸치 좀 샀어. 지난번 현진 엄마가 통영에서 사다준 멸치가 너무 맛있었잖아. 그래서  더 부탁했지."
   "근데 이렇게 많이 사시면 어떡해요? 한 2년어치는 되겠어요. 필요할 때 조금씩 사 먹는 게 더 좋은데, 이거 보관하기도 힘들겠어요."
   "택배비 아끼려고 한꺼번에 많이 샀더니 그러네."
아내는 그 많은 멸치들에 대해서 난감해하며, 내게 또 슬쩍 하소연을 했다.
   "난 도대체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평소에는 음식은 그때그때 햇것으로 먹어야 좋다고 하시면서. 지난번엔 상하기 쉬운 들기름을 그렇게 많이 한꺼번에 사시더니."
    이런 아내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나의 방정맞은 입은 또 한 번 실수를 하고 말았다.
   "맛있는 멸치라고 하니 두고두고 먹으면 좋...."
또 한 번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앞으로 한 달 동안 멸치만 먹어 보시려고?"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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