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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플마 Sep 01. 2019

목걸이를  사지 말아야 할 이유

'야, 아무래도 그 옷은 지금 사면 안 되겠어. 몇 번 입지도 못하고 겨울이 끝나잖아.'

'그래, 맞아. 그리고 그 옷을 입으려면 좀 나이 들어 보이게 화장을 해야 해. 그건 싫다, 애'

'그리고 그 옷은 큰 파티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데, 우리가 그런데 참석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냐?'

'그리고..... 그리고.....'

우연히 엿듣게 된 두 멋쟁이 아가씨들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란 단어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지난겨울 어느 백화점의 여성복 매장들과 연결된 에스컬레이터에서의  일이다.  나와 아내 바로 앞에 있던 두 명의 아가씨가 흥분하여 큰 소리로 대화를 하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이들의 얘기를 본의 아니게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방금 전 멋진 옷을 발견했으나 사지는 못한 모양이었고 그것을 무척이나 억울해하는 듯했다. 얼마 후 아가씨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후, 아내가 말했다.

"옷을 사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박사 논문이라도 쓸 기세네. 그냥 비싸서 못 샀다고 하면 될 것을."

"그러게."

나는 아내의 말에 재미있는 아가씨들이라고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나도 그 아가씨들과 똑같은 소리 들들을 아내에게 했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 우연이 참으로 흥미로왔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기억은 내 마음속 한 구석을 씁쓸하게 하는 편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얼마 전 아내와 나는 주말 데이트 코스로 남대문 시장을 갔었다. 꼭 사야 할 물건은 없었지만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남대문 시장에 가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었기에 그냥 새롭고 다양한 구경거리와 먹거리가 많을 듯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데이트 코스는 우리 부부에게는 대성공이었다. 우선 단돈 몇천 원에 색다르고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나를 만족시켜 주었다. 그 가성비가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다. 한편 아내를 즐겁게 한 것은 다양하면서도 저렴한 악세서리들이 있는 쇼핑몰이었다. 아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악세서리 샾 이곳저곳을 계속 기웃거렸다.    

평소 아내는 반지, 목걸이, 귀걸이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아내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악세서리 쇼핑몰에서 전혀 지치지 않고 반지, 목걸이,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무심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 알았으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가끔 선물이라도 할 걸.'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오늘 남대문 시장에서의 아내 행동을 보니, 아내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일부러 멀리 해왔다는 것을. 아마도 사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서도 악세서리들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가격을 물어본 후에는 그 자리에 내려놓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대부분의 가격이 단돈 몇만 원짜리인데도 아내는 사려는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냥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처지가 이 정도 가격의 이런 것도 못 살 형편은 아니며, 더구나 전문직인 아내는 수입도 좋은 편이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자신만을 위한 악세서리들을 자기 돈으로 사는 것이 내키지 않은 듯했다.

"여보, 내가 하나 사 줄테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 너무 만지작거리기만 하네."

"그래요? 그러면 이리 와볼래요?"

아내는 아까 한번 지나치며 둘러봤던 한 매장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아내는 네 잎 클로버를 기본 문양으로 한 길게 늘어진 목걸이를 하나 골랐다.

"이건 어때?"

"멋있는데. 잘 어울리네."

실제로 그 목걸이와 아내는 잘 어울렸다.

"너무 예쁘네요. 거기에 이 반지와 귀걸이도 함께 하면 훨씬 더 예쁠 거예요. 그리고 이 모양의 세트들도 잘 어울릴 거예요."

우리가 목걸이를 살 듯한 태도를 보이자 매장 주인은 이때다 싶어서인지 우리 대화에 뛰어들어 더 많은 아이템들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내가 그동안 숨기고 있던 악세서리 브랜드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대방출하기 시작하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아내와 매장 주인 사이에는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브랜드명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어머 이거는 쏼라쏼라 문양을 기본으로 한 거네요. 이거는 울랄랄라가 기본이네요. 진짜 이쁘네요."

아내는 약간 흥분한 듯했고 매장 주인이 권하는 그 악세서리들을 모두 사버릴 듯한 기세였다.

'어, 아내한테 저런 면이 있었네. 내가 너무 몰랐었네. 근데 설마 저것들을 다 사지는 않겠지?'

한참 동안 악세서리 이것저것을 착용해보고 풀어놓곤 하며 다 살 듯한 기세를 보이던 아내가 어느 순간 평상심으로 돌아온 듯했다.

"오늘은 이것만 살게요. 너무 어질러놔서 죄송하네요."

"아니 그건 괜찮은데, 너무 아깝네. 이 목걸이도 정말 잘 어울리는데. 조금 더 빼줄 테니까 이것도 하나 더 사시지? 번갈아가며 쓰면 좋을 거예요.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것을 놓치면 너무 아쉽잖아요?"

하지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내는 요지부동이었고, 결국은 네 잎 클로버 문양의 목걸이 하나만을 샀다.

'분명히 악세서리에 대한 관심이 많은 듯한데, 절약정신과 인내심이 대단하네. 달랑 저거 하나만 사다니.'    

그날 이후 아내는 매일 그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난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목걸이를 그동안 사줄 생각도 못했다는 것, 그리고 남대문 시장에서 그토록 싼 물건을 달랑 하나만 사야 하는 절약 정신의 처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목걸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네. 아무튼 잘 어울리고 예쁘네."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을 갖다 준대잖아. 그래서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하는 거야. 전부터 네 잎 클로버 악세서리는 꼭 하나 갖고 싶었었는데, 운 좋게 하나 찾은 거지."

"그때 보니까 반지랑 귀걸이도 있던데, 그것도 살 걸 그랬나?"

"아니, 그것들은 쓰지도 않을 거라 살 필요는 없어. 근데 진짜 네 잎  클로버 명품 목걸이가 있는데, 사실은 그걸 갖고 싶기는 한데 너무 비싸서...."

"그래? 그럼 내가 하나 사줄게. 언제 한번 같이 가자구."

하나 사주겠다는 내 말에 아내는 살며시 웃음만 지어 보일 뿐 그다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목걸이 하나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겠어? 25년 사는 동안 제대로 된 선물 하나 사주지 못했는데, 큰 맘먹고 하나 사지 뭐.'    

다시 주말이 되었다. 우리는 잠실의 롯데 월드 타워점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저녁으로 뭘 먹을까 생각 중이었다. 그때였다.

"네 잎 클로버 목걸이 보고 싶다고 했지? 한번 보러 갈까?"

아내는 나를 애비뉴엘 몰로 데리고 갔다. 그 쇼핑 몰의 한쪽에 V로 시작하는 아주 복잡한 이름의 명품 샾이 있었고 그 샾의 앞쪽에는 마네킹 하나가 아주 화려하고 멋들어진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다.  물론 기본 문양은 네 잎 클로버, 아니 아주 아주 세련된 네 잎 클로버였고 거기에 반짝반짝 다이아몬드들이 멋지게 장식된 탐나는 목걸이다.

"이 목걸이 얼마나 하죠?"

내가 살 수 있는 수준의 목걸이가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살 형편이 될지도 모르므로 가격은 알아놔야 되지 않겠는가? 그 가격을 목표로 열심히 돈을 모으면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으리라.

"예, 손님. 이 목걸이 가격은 1억 9천5백만 원입니다."

'예??????'

난 더 이상 매장을 둘러볼 생각을 못하고 그냥 나와 버렸다. 분명 우리가 살만할 수도 있는 훨씬 더 싼 가격의 다른 물건들도 있었겠으나 그 목걸이 가격을 듣는 순간 이곳은 내가 올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다.

"저 목걸이 정말 예쁘다. 어때? 근데 너무 비싸지?"

"어? 어!"

주제 없이 아내에게 명품 목걸이 하나 선물하겠다고 큰소리쳐놓았다가 정작은 매장에서 도망치다시피 뛰쳐나온 나였기에, 아내의 얘기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의 '명품 목걸이 불가'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시작되었다.

"저 목걸이는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겠는데. 평상시에는 사용하기 힘들겠어. 큰 파티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데, 우리가 그런데 참석할 기회가 있겠어?"

"그리고  저 목걸이를 하려면 나이가 좀 지긋해야 어울릴 것 같아. 우린 아직 젊은이 컨셉이라 좀 안 어울릴 것 같네."

"그리고 저런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범죄 표적이 되겠는데.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일으킬 것 같아."

"그리고..... 그리고....."

아마도 아내가 내 말을 끊지 않았다면, 나의 '명품 목걸이 불가론'은 저녁 내내 계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보, 나는 저런 비싼 목걸이에는 관심 없어. 나한테는 어울리지도 않고. 그나저나 저녁은 뭘 먹을까?"    

아마도 이 시점에서 아내는 이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목걸이를 사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박사 논문이라도 쓰시려고? 그냥 비싸서 못 산다고 하면 될 것을.'    

우린 그날 저녁 인근의 맛집을 찾아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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